['고비용' 벽을 깨자] (9) 제1부 <8> ''나가라' 증후군'

한국유리 인천공장의 반장이던 박성진씨(43.가명)는 회사를 지난달 초 떠났다. 명예퇴직을 한 것이다. 20년동안 몸담았던 회사를 "자의반 타의반" 그만두며 박씨가 받은 현금은 총 1억5천만원 정도. 박씨는 그래도 나은 편이다. 한국유리에선 이번에 30대 대리는 물론 20대 직원들까지도 나갔다. 겨우 몇천만원씩을 손에 쥐고.. 이런 사람들이 총 4백90여명에 달했다. 전체 직원의 20% 규모다. 반월공단의 전자부품 업체인 P사는 올초 중국으로 공장을 이전키로 했다. 내년말 중국 공장이 완공되면 국내 설비를 모두 옮겨 반월공장은 문을 닫을 계획이다. "매출액의 30%를 넘는 인건비를 감당할 수 없어 결심했습니다. 1백20여명의 여기 직원들이 눈에 밟히긴 하지만 이대로 가다간 회사가 날라갈 판인데 어떻게 합니까"(P사 Y사장). 산업현장 전반에 전염병처럼 번지고 있는 "나가라 증후군"의 단면들이다. 기업에선 직원들이 나가고, 회사는 해외로 나간다. 엄밀히 말하면 직원들은 쫓겨나는 것이고, 기업들은 한국을 탈출하고 있는 것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바로 고임금 탓이다. 실제로 기업들은 최고 60개월치 월급 등 파격적인 명예퇴직금을 주더라도 사람을 내보내는 게 낫다는 판단이다. "예컨대 1천명을 내보내 퇴직금으로 1천억원을 쓰더라도 그게 싸게 먹힌다. 평균 연봉을 3천만원씩만 따져도 3-4년 후엔 그 정도 이상이 들어가기 때문이다"(선경인더스트리 서태구 인력관리실장). 해외로 빠져 나가는 기업들도 마찬가지다. "LG화학의 국내공장 초임 생산직 근로자의 월평균 임금은 1백19만4천원이다. 헌데 이 회사 말레이사아 페낭공장의 현지 근로자들은 평균 23만4천원을 받는다. 게다가 한국에선 각종 수당이 1백여개가 넘고 때만 되면 선물을 줘야하는 등 "보이지 않는 부담"이 한두가지가 아니다. 상황이 이런데 어떤 미친 기업이 한국에서 사업을 계속하려 하겠는가"(전경련 관계자) 한국 기업들의 "나가라 증후군"은 좀처럼 사그라들 조짐이 없다. 오히려 국내 경제불황과 맞물려 더욱 악화되고 있다. 올들어 최근까지 명예퇴직제를 도입해 직원들을 몰아낸 회사는 선경인더스트리 LG정유 대우중공업 삼양사 한국유리 포스틸 포스코개발 등 50여개사에 달한다. "불황이라 오히려 잘됐다. 이번 기회에 고임금 인원을 대폭 감축할 수 있게 됐으니 말이다"(S사 L사장)는 자조섞인 푸념마저 나올 정도다. 세계화 바람을 타고 거세어진 대기업들의 해외진출 붐도 더하면 더했지 그칠 줄을 모른다. 지난 90년 5백15건, 12억6천달러였던 한국기업의 해외투자는 지난해 1천5백60건, 49억달러로 급속히 불어났다. 올들어도 7월까지 9백64건, 30억달러에 달했다. 기업들의 감원과 해외진출은 "나가라 증후군"이란 공통점외에도 닮은게 또 있다. 바로 두 현상의 귀착점이 모두 국내 고용불안이란 점. "기업들이 사람을 내보내는 것이나 공장을 외국으로 옮기는 것이나 다 한국에선 일자리를 줄인다는 얘기다. 결국 실업증가가 야기될 게 뻔하다"(이윤호 LG경제연구원 대표). 근로자들이 목청을 높여 기껏 올려놓은 고임금이 "부메랑"처럼 되돌아와 근로자들의 목을 겨냥하고 있는 형국이다. 물론 고임금을 무조건 매도할 순 없다. "임금상승은 국민들의 소득을 증대시켜 그만큼 경제생활을 윤택하게 하는 순기능이 있다. 단 순기능엔 높은 임금을 유지할 수 있을 만큼 높은 생산성이 뒷받침 돼야 한다는 전제가 필요하다. 그러나 한국에선 이 전제가 무시되고 있다. 기업들이 고임금에 넌더리를 치며 해외로 튀어나가는 것이 반증 아닌가"(김영배 경총 정책본부장) 어쨌든 "나가라 증후군"의 피해자는 기업은 물론 근로자 자신들도 예외가 아닌건 확실하다. 비근한 예로 한국유리 근로자들은 노조의 "쟁취"로 지난해말 평균 5백만원씩의 성과급을 받았다. 하지만 그 포만감이 가시기도 전에 이 회사 근로자들의 10명중 2명은 정든 회사를 떠나야 했다. 그런 점에서 독일 벤츠사의 사례는 타산지석으로 삼을 만하다. 지난해 벤츠사는 대대적인 정리해고를 검토했다가 이를 곧바로 철회했다. 벤츠사 노조가 앞장서 임금을 삭감하고 근로시간을 줄여 감원을 저지한 것이다. 노조로선 근로자들에게 많은 임금못지 않게 안정적인 일자리를 보장해주는 것도 중요했기 때문에 임금인하라는 결단을 내렸다고 한다. 임금인상을 자제하고 안정적인 일자리를 유지할 것이냐, 아니면 잘릴때 잘리더라도 일단 왕창받고 볼 것이냐. 이 문제야 말로 근로자들 스스로 곰곰히 고민해봐야 할 과제중 하나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9월 18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