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속의 한국인] (19) 장정웅 <호주 한호그룹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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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 시드니에서 레스토랑들을 몇군데만 다녀본 사람은 의외로 많은 식당에서 한국산 소주를 취급하고 있는 데 놀랄 것이다. 이런 식당들이 시드니의 한국 교민들만을 노리고 파는게 아니다. 호주 현지인들도 이 술을 즐겨 찾을 정도로 한국 소주에 입맛을 들여가고 있는 것이다. 아무튼 한국소주는 그야말로 "불티나게" 팔리고 있다. 이곳에서 파는 소주는 모두 장정웅회장(55)이 경영하는 한호사에서 수입,판매하는 것이다. 한호사는 호주 시드니에 있는 8개의 종합 주류 도매업체 중 유일하게 호주 사람이 아닌 이민자가 경영하는 업체. 장회장은 주류업에 진출한지 10년만에 이 회사를 연 매출 7백만달러의 대형 주류도소매업체로 만들어냈다. 그리고 지금 그는 무역 금융 건설분야에 5개의 계열회사를 거느린 어엿한 그룹의 총수다. 장회장이 처음부터 "술장사"를 한 것은 아니다. 중견기업의 호주 지사장으로 근무하다 독립을 결심하고 이곳에서 처음 사업을 시작할 때 다루었던 아이템은 잡화류. 그는 당시 보잘것없는 자본에 그야말로 "맨입"만 가지고 "일"을 벌인 셈이었다. "가두방송"이라는 마케팅 기법을 택하게 된 것도 그 때문이다. "가두방송"이라면 한국에서 두부나 콩나물 등을 파는 행상들이 누구나 사용하는 판매 방법. 한국인에게는 너무나 자연스러운 방법이었지만 호주인들에겐 낯설기만 했고 그래서 행인들의 관심을 끌 수 있었다. 가난한 한국 행상들의 마케팅 기법이 호주 시장에 먹혀들어갔던 셈이다. 지금 시드니 시내중심가에는 마이크로 갖가지 상품을 선전하며 손님을 끄는 이 상술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고 한다. 그는 이 "쓸만한" 아이디어 하나로 꽤 많은 돈을 모을 수 있었다. 그리고 이것이 훗날 그가 주류 도소매업에 진출해 그룹 회장으로까지 나아갈 수 있었던 밑바탕이 됐다. 장회장은 원래 장사와는 거리가 먼 언론인 출신이다. 지난 41년 일본 오사카에서 나서 해방되던 해 귀국, 대구에서 자란 그는 대학(경북대 법학과)을 졸업하던 해 동양통신에 입사했다. 편집부 기자생활을 로 사회에 첫 발을 디딘 그는 5년뒤 당시 중견 무역회사였던 (주)대원의 무역담당 이사로 자리를 옮겼다. "언론인으로서 사회의 어두운 곳을 비추는 일도 좋았지만 세계 시장에 우리 상품을 팔아 어려운 경제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는 일을 하고 싶었습니다" 그는 지난 74년 범세실업 전무로 다시 한번 자리를 옮겼다. 5년 뒤인 79년 호주에서 시드니지사장에 근무하다 (주)서울통상을 설립하고 홀로서기에 본격적으로 나서게 된다. 그가 처음 시작한 사업은 전복껍질 수출. 호주 해변에 그냥 버려지는 패각을 주워다가 한국에 팔고 그 패각으로 만든 공예품 액자 화병 가구류와 섬유 등 일반 잡화류를 한국으로부터 수입, 현지에서 스톡세일을 했다. 잡화류 상점을 체인스토어로 운영하면서 그가 고안해낸 방법이 다름아닌 "가두방송". 물론 처음부터 사업이 순조롭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이웃 상인들의 진정으로 지방정부로부터 경고를 받기도 했다. 그렇지만 당시만해도 한국산 경공업제품은 상당한 가격경쟁력이 있었다. 또 그는 우선 자기 자본으로 수입한 뒤에 제품을 판매하는 "선수입 후판매"방식을 택했기 때문에 주문량이 적다고 대형 업체로부터 주문을 거절당한 소량 바이어들이 많이 몰렸다. 그가 이후 사업의 기반을 마련한 때가 바로 이 시기다. 80년대 후반까지는 호황이 계속됐다. 그러나 이후 한국의 임금인상과 호주정부의 한국에 대한 일반특혜관세(GSP)공여 중지 등으로 한국산 제품의 가격경쟁력은 크게 떨어졌다. 바이어들이 중국이나 동남아로 거래선을 바꾸기 시작한 것. 이에 그는 비즈니스의 방향을 전환키로 한다. 이때부터 심각하게 고려하기 시작한 사업이 바로 주류업. "주류업은 내수와 무역을 병행할 수 있습니다. 어느 한쪽에서 손실이 발생해도 다른 한쪽이 이를 커버해 줄 수 있어 위험이 분산되는 것이죠" 그가 이 일을 택한 이유다. 그는 87년 호주 정부로부터 주류 수입허가서와 주류 종합 도소매업 허가서를 받아냈다. 이민자 출신으로는 처음이자 유일한 경우였다. 이에 따라 그는 우선 소주를 포함한 한국산 주류를 호주시장에서 독점 판매했다. 한국 소주를 호주에서 팔려면 우선은 이 술을 호주사람들에게 알려야 했다. 이를 위해 캔버라의 호주 관세청에서 호주 주요 장차관들을 초청, 한국 주류 시음회를 갖고 88년에는 시드니의 라마다 르네상스 호텔에서 호텔측과 공동으로 "한국음식 및 주류 페스티벌"을 7일간 대대적으로 개최하는 등 각종 행사를 벌였다. 이와함께 호주 내수시장을 겨냥한 호주산 및 제3국산 주류 종합 도소매업에도 최선의 노력을 다했다. 호주가 많은 소수민족으로 구성되어 있는 다민족 사회라는 점을 감안해 그는 일본인 중국인 태국인 필리핀인 등을 회사직원으로 채용한 후, 동양계 이민자 그룹을 집중적으로 공략해 나갔다. 그의 배달체제는 남달랐다. 그는 호주에서는 드물게 24시간 배달 서비스체제를 갖추고 적은 양의 주문에도 가리지 않고 배달해 주었다. 또 여타 대형업체들은 오후 5시가 지나면 배달을 해주지 않았지만 그는 주문만 있으면 언제든지 냉장고 앞까지 배달해 주었다. 당연히 거래선이 몰려들었다. 야간배달 인력은 낮에 공부하고 저녁에는 일을 하는 한국인 유학생들을 이용해 충원했다. 공부하는 학생들에게는 일거리가 생겨서 좋고 장회장은 충분한 서비스를 제때 고객에 제공할 수 있으니 누이좋고 매부좋은 격이었다. 주류 판촉에서도 그는 집념을 발휘했다. 판매를 거절하는 업소나 자사 제품을 팔지 않는 업소들을 공략하기 위해 3인조 판촉팀을 조직한 것. 손님을 가장해 그 업소에 들어가 여타 음식을 주문한 뒤 자기회사 드링크를 달라고 해서 없다고 하면 그자리에서 나오기도 했다. 때로는 "그 술이 너무 좋아서 차에 있는 술을 가져다 마시겠다"고 하고 가져와서는 주인에게도 한잔 권하고 "요즘 이 술이 인기인데 왜 이집엔 없느냐"고 묻기도 했다. 친절하고 정확한 서비스와 교묘한 판매전략으로 한호사는 불과 10년만에 연매출 7백만달러를 올리는 호주 굴지의 주류 도소매업체로 성장했다. 식당 호텔 나이트클럽 등 현재 그가 납품하고 있는 업체만해도 4백50개가 넘는다. 2000년은 그가 회갑을 맞는 해다. 시드니 올림픽이 개최되는 해이기도 하다. 그는 "한호그룹을 한국인들에 떳떳이 얘기할 수 있는 자랑스런 회사로 키워보자"는 목표아래 지난 89년 10개년 계획을 세우고 이를 하나씩 실천해 가고 있다. 지난 92년에는 (주)한호서비스를 설립, 증권 및 투자신탁업에 진출했고 93년에는 (주)한호보험을 세워 일반 보험업에도 뛰어들었다. 처음 금융업을 시작하면서 다소의 어려움이 없지 않았지만 이제는 어느 정도 자리가 잡혀진 상태다. 지난해엔 (주)한호부동산을 세워 2000년 시드니올림픽을 겨냥한 건설 및 레저사업에도 손을 뻗쳤다. 현재 시드니 및 피지에 아파트와 리조트를 짓기 위해 부지를 확보해 놓은 상태다. "취미가 뭐냐구요. 남들 놀 때 일하고 남들 일할 때 더 열심히 일하는 겁니다" 일하는 재미로 살아가는 사람. 그 열정이 그를 오늘 호주에서 무역 금융 건설 등 5개 계열회사를 거느린 한호그룹의 총수로 우뚝 서게 했다. 그는 골프를 치지 못한다. "골프천국"이라고 불리는 호주에서 대기업의 회장이 골프를 못친다면 정말 이상한 일이다. "저라고 왜 골프를 치고 싶지 않겠습니까. 골프공이 창공을 가르는 쾌감보다 주어진 일에 미치는 즐거움이 저 자신은 물론 기업과 사회에 보다 보람된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골프채를 잡지 않았을 따름이지요" 장회장이 맹목적으로 일에 미친 것은 아니다. 그에게는 호주에 한국의 얼을 심고 싶다는 소박한 꿈이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 대양주에 한국기업을 우뚝 세워서 우리 2세들이 한국인의 긍지를 가지고 살아가게 하고 싶습니다. 또 그들이 더욱 기업을 크게 성장시켜 한국의 대양주가 되었으면 하는 것이 제 소망입니다" 장회장은 이곳을 한국의 대양주로 키우는 한편 앞으로 생을 마감할 때 기업 전부를 사회에 기증할 생각이다. "얼마나 벌었느냐 보다는 얼마나 베풀었느냐"를 더욱 중시하는 것이 그의 기업철학이기 때문이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9월 24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