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 '좁은 문'으로 .. 이성섭 <숭실대교수/무역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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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출이 부진해서 모두가 걱정을 하고 있다. 2.4분기에는 전년대비 한자리 성장으로 둔화되더니 3.4분기부터는 전년대비 마이너스 성장을 하고 있다. 그 결과 경상수지는 벌써 금년 누계 150억달러의 적자에 육박하였고 연말까지 200억달러 이상의 적자가 예상된다. 아직 경기침체를 얘기할 단계는 아닌 것 같다. 과장하면 사태판단을 그르칠 위험이 커진다. 지난 7월 실업률은 1.8%였다. 이것은 유사 이래 가장 낮은 수준이다. 그러나 수출부진이 계속되면 경기가 영향을 받게 된다. 문제는 안에서보다 밖에서 발원하고 있는 듯하다. 산업경쟁력이 몇달을 주기로 약화되었다고 볼 수는 없다. 오히려 "엔저"로 인한 대일 경쟁력 약화, 중국 경제의 부상, 구사회주의권 경제의 활성화, 동남아 경제의 추격, 남미 경제의 발전, 인도 경제의 등장,구미 경제의 활성화 등 복합적 요인이 작용한 결과가 아닌가 한다. 그만큼 지구촌 먼곳의 변화가 직접적으로, 그리고 신속하게 우리에게 영향을 주는 세상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외적변화는 불안정한 국제금융시장의 영향을 받은 요인, 즉 엔저도 있지만 보다 본질적으로는 다른나라 경제들이 개방과 개혁을 통하여 시장을 활성화함으로써 산업경쟁력을 제고시켰기 때문에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한 우리의 대응도 개혁을 통하여 시장경쟁을 활성화시키고 이것을 개방과 연결시켜야함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정부에서는 "국가경쟁력 10% 높이기"를 목표로 대응정책을 구상하고 있다는 보도이다. 기업인을 격려한다는 것은 나쁠 것 없겠으나 국가경쟁력을 몇% 높인다는 것은 무슨 신기루 쫓는 놀음하는 느낌이 들어 다소 불안감이 없지않다. 우리 기업들, 특히 대기업은 인플레 여건에서 커왔다. 그래서 인플레 투기 패턴이 체질화되어 있다. 수출 또는 산업경쟁력을 구실로 저리 금융을 요구한다. 이들이 저리로 자금을 당겨 쓰니 경제의 다른 부문이 압박을 받을 수밖에 없다. 압박을 받는 부문(주로 중소기업)의 부도율이 올라가면 정부가 돈을 풀지 않을 수 없다. 결국 인플레로 가게 된다. 원론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인플레는 돈을 빌려 쓴 사람을 유리하게 한다. 갚아야 할 돈이 인플레율 만큼 작아진다. 실질임금이 낮아지니 임금부담도 줄어든다. 반면에 남보다 많은 정보와 인력 및 조직을 이용해서 저리융자로 풍부해진 재정을 바탕으로 투기를 할 수 있다. 인플레.투기 메커니즘을 이용해서 득을 볼 수 있는 측은 주로 대기업.재벌이다. 중소기업이나 서민은 이 메커니즘의 악순환에서 죽어날 판이다. 인플레.투기 메커니즘 속에서 우리의 산업조직은 대기업.재벌 중심으로 형성되어 왔고 중소기업은 이들과 계열화되어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단히 취약한 모습을 하게 되었다. 인플레.투기 메커니즘의 결과 사회적으로는 한탕주의가 판을 치게 된다. 기업은 기술개발과 같이 돈이 많이 들고 위험성이 높은 장기투자를 회피하게 된다. 인플레.투기 메커니즘이 바로 "고비용.저효율" 경제구조의 근본요인이다. 원인은 간단하다. 우리경제가 인플레.투기 메커니즘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의 사정이 1980년대 후반보다는 낫겠지만 아직 인플레.투기 메커니즘에서는 벗어나 있지 못하다. "국가경쟁력 몇 % 높이기"의 구호가 불안하게 느껴지는 것은 인플레.투기 메커니즘이 발동하기 전에는 늘 가시적 성과를 추구하는 정부주도의 정책기조가 전면에 등장했었기 때문이다. 구조적으로 정부주도의 정책기조는 인플레.투기 메커니즘으로 연결되게 마련이다. "고비용.저효율"구조를 탈피하는 유일한 길은 정부주도와 규제위주의 제도에 의해서 운용되는 사회.경제의 각 부문을 민간의 경쟁질서로 대체하도록 제도개혁을 하고 인플레.투기 메커니즘을 분쇄하는 것이다. 그러나 인플레.투기 메커니즘을 벗어나는 것은 쉽지 않다. 물가안정은 고실질금리,고실질임금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사회.경제의 각부문에 민간의 경쟁질서를 심는 작업도 정부규제에 이권을 쥐고 있는 계층의 저항을 받게 마련이다. 대다수의 사회 구성원은 인플레.투기 메커니즘이라는 "넓은 문"을 택하려 한다. 통화를 풀라고 하고 금리를 낮추라고 한다. 제도개혁과 물가안정이라는 "좁은 문"은 인기가 없다. 그래서 금융부문에 개혁이 더뎌지고 사법, 노사, 교육개혁이 어려운 것이다. 현정부는 금융.토지거래의 실명제라는 어려운 위업을 이룩했다. 그러나 이것은 완성이 아니고 새로운 경제질서를 만드는 과정의 시작에 불과하다. 실명제를 바탕으로 하여 한편으로 물가안정을 지켜야 하며 다른 한편으로 사회.경제 각부문에 존재하는 규제위주의 제도를 고쳐서 민간의 경쟁질서를 심는 작업을 꾸준히 해야 한다. 특히 금융산업에 경쟁질서를 심는 작업은 금융이 차지하는 중요성 때문에 우리경제가 해결해야 할 절실한 당면과제이다. 현재 우리 금융산업은 경쟁적 시장구조가 아닌 재경원을 정점으로 하는 거대한 조직구조의 양상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조직구조적 특성으로 인해서 금리자유화가 시행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금융산업에서는 시장의 경쟁질서가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고 있다. 금융.토지거래의 실명제가 경제에 부담을 주는 면이 있다면 그것은 금융산업에서 정상적 시장경쟁질서가 작동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9월 30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