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루몽] (538) 제12부 낙엽 진 뜨락에 석양빛 비끼고 (34)

날이 새자 대옥이 훨씬 차도를 보여 혼자서 일어나 앉기까지 하였다. 시녀들이 끓여온 미음도 한 그릇 비웠다. 자견은 대옥이 이번 병으로 죽지는 않겠구나 싶어 안도의 한숨을 크게쉬었다. 하지만 아침나절이 지날 무렵 대옥은 먹었던 미음을 모조리 토해내며 또 각혈을 하였다. 그리고 대옥은 무슨 악몽을 꾸는지 손을 휘저으며 헛소리를 하기도 하였다. "나를 데려가려면 속히 데려가. 내 앞에서 얼쩡거리지만 말고" 그 소리를 들으니 저승사자들이 대옥을 데리러 온 것만 같아 자견은 등골이 서늘해졌다. "얘들아, 대옥 아가씨 곁을 떠나지 말고 지키고 있어. 난 아무래도 대부인 마님께 여쭈러 가봐야겠어" 자견이 달음질을 하다시피 해서 대부인의 거처로 왔다. 그런데 할멈 시녀 두어 명과 견습시녀 몇 명만 허드렛일을 하고 있을 뿐 집안 전체가 텅 빈 채 적막하기 이를 데 없었다. "대부인 마님께서 어디로 가셨어요?" 자견이 할멈 시녀들에게 물어보았으나 묵묵부답이었다. 저 사람들이 갑자기 벙어리가 되었나 싶어 견습시녀들에게 물어도 고개를 가로 저을 뿐이었다. 이번에는 자견이 보옥의 방으로 가보았다. 그 방도 역시 텅 비어 있었다. 그제야 자견이 사람들이 보옥의 신방이 꾸며져 있는 별채로 몰려 갔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대옥 아가씨는 지금 생사의 기로에서 헤매고 있는데 보옥과 보채의 혼례에만 신경을 쓰고 있는 집안 어른들이 새삼 원망스럽기만 하였다. 그래서 자견은 별채로 가볼까,다시 소상관으로 돌아갈까 망설이면서 대문께에서 서성거렸다. 그때 보옥의 시동인 묵우가 저쪽 모퉁이에서 돌아나오다가 자견과 마주쳤다. "자견 누나, 여기서 뭘 하는 거야?" "너는 무얼 하고 있니?" "나야, 도련님 혼례 준비로 심부름하느라 바쁘지" "혼례를 곧 치를 모양이지?" 자견이 다시 한번 텅 빈 집안을 둘러보았다. "오늘밤이잖아. 자견 누나는 그것도 몰랐어?" "뭐야? 오늘밤? 보옥 도련님이 보채 아가씨와 혼인을 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빨리 할 줄은 몰랐네" 자견은 집안 어른들이 소상관 사람들 몰래 혼례를 후딱 치르려 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채고 더욱 서운하고 원망스러웠다. 그 사람들은 대옥 아가씨가 보옥 도련님 혼인에 방해가 된다고 여겨 이번 병으로 죽기를 은근히 바라고 있는지도 몰라. 그런 생각까지 스치고 지나가자 자견의 두 눈에서는 노를 드리우듯 눈물이 뚝뚝 흘러내렸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10월 4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