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신과 함께 걸어온 길] (15) 정부출연 연구기관

서정욱 TDX때문에 불려와 품질보증의 씨를 뿌리며 전화사업에 매달리던 KT에 정보통신의 새바람을 넣다보니 어느덧 7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그러던 1990년말 김진현 동아일보 논설주간이 과학기술처 장관에 임명됐다. 그 축하의 자리를 함께 했던 나는 김장관이 분파성이 짙은 우리나라 과학기술계에 초분야적(Transdisciplinary)협력풍토를 조성해주기를 바라면서, 어떤 일이든 나도 일조를 해야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이심전심이랄까. 김장관은 나를 과학기술처 차관으로 천거했다. 오랫동안 연구소와 산업에서 얻은 체험을 과학기술 행정에 활용하게 된 것이다. 핵폐기물 처리장 문제가 비화되어 장관이 바뀐터라 김장관의 임명에 놀란 사람도 있었지만 내가 아는 한 결코 뜻밖의 인사는 아니었다. 그는 1965년 한-미 두나라 대통령이 KIST설립에 합의했을 때 과학기술계와 언론의 침묵을 일깨우듯 동아일보 경제부 차장으로서 KIST 설립의 의의에 대해 해설기사를 썼으며, 86년에는 그의 고정 칼럼에서 TDX개발을 두고 "나쁜 정치속에서의 발전"이라고 평가한바 있었다. 그는 또한 과학기술 운동을 "제2의 독립운동"이라고도 했다. 그만큼 민족적 과학기술관을 가지고 그는 정보화사회의 미래에 대해서 선견적인 비전을 제시해왔다. 91년 3월 "제조업 경쟁력강화대책 회의"에서 노 대통령은 "22개 이공계출연 연구기관이 연간 2천5백억원을 쓰고 있다. 이들이 제대로 쓰이고 있는지 관련부처가 합동평가반을 구성해 정밀진단한 뒤 보고하라"고 지시했다. 그 의도가 어디에 있든 정부출연 연구기관의 운영이 큰 문제로 대두되었음을 나는 직감했다. 이미 KT시절에 나는 과기처가 "정부출연 연구소 이사회는 제구실을 하고 있는가"라는 테마로 개최한 공청회에서 이사회중심 운영에 관해 주제발표를 한 일이 있었다. 그 요지를 소개하면 이렇다. 우선 출연 연구기관을 이사회중심으로 운영할 때 기능형으로 하느냐,정책형으로 하느냐가 문제가 된다. 이사회가 집행기능도 갖고, 결과에 대한 책임도 지는 기능형으로 전환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또 집행부의 권한과 책임에 어떤 영향을 줄 것인지 검토해야 한다. 84년 정부가 정부투자기관에 책임경영 제도를 도입하면서 집행간부는 내부에서 기용하고, 이사회는 전원 비상임 외부인사로 구성했다. 결국 집행간부 중심이 됨으로써 이사회 무용론까지 나온 것을 보면,전환에 앞서 운영의 묘를 살려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효과적인지 모른다. 당연한 말이지만 이사회 중심에는 정부의 간섭을 배제하자는 의도와 집행부에 자율경영권을 주자는 의도가 있다. 그렇다면 이사회는 집행부가 자율경영을 할 수 있도록 해주면 된다. 따라서 정책형 이사회를 만들어 집행부에 자율 경영권을 주되 경영에대한 책임을 지도록 해야 한다. 또한 이사 전원이 비상임이라는 점을 보완해 일부 상임이사를 두어 집행부와 항상 대화함으로써 연구소경영과 장기발전전략 수립을 지원해야 한다. 그런가 하면 연구기관은 출연하는 정부나 기업을 고객으로 존중해야 한다. 위탁을 받아 창출한 지식 기술 정보 등은 지적재화로서 고객을 충분히 만족시켜야 연구기관에 대한 신뢰가 높아지고, 또 지속적인 출연도 가능해진다. 집행부는 사람 돈 시간 등 연구개발의 원가를 절감하지 못하면 경쟁에서 살아남지 못한다는 기업가 정신을 발휘해야 한다. 특히 대학과 기업의 연구능력이 증대되는 상황에서 출연 연구기관의 생존은 보장된 것이 아니다. 기업들이 국내 연구기관을 외면하고 외국의 대학이나 연구소를 찾아가는 사실을 출연 연구기관들은 주시해야 한다. 출연 연구기관의 생산성은 연구 실무진의 자질에도 달려 있지만 상당한 부분이 집행부의 연구관리능력 및 사업집행능력에 달려 있다. 우수한 인력과 시설을 확보해 놓고도 부실한 관리때문에 연구자원을 낭비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이사회는 경영 평가기능을 강화해야 한다. 나의 의견은 대략 이런 것이었다. 결국 총리실이 "정부출연연구소 정부-민간합동평가단"을 과기처가 주관하도록 하자 나는 그 단장을 맡게 됐다. 그무렵 과학기술계 자체는 물론 산업계에서도 출연 연구기관의 침체를 우려하는 소리가 높았지만, 정확한 원인을 지적하고 그 타개책을 제시할 전문가가 없었다. 매사에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말이 있듯이 나는 평가에 앞서 각 연구기관으로 하여금 백서를 작성하도록 했다. 스스로 자기조명을 해보라는 뜻이고,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다 해보라는 뜻이었다. 한편 나는 출연 연구기관의 자초지종을 되돌아보는 온고이지신을 했다. 1960년 중반 KIST설립을 기점으로 다양한 목적으로 설립된 정부 출연 연구기관들은 안정된 재정을 기반으로 의욕적인 활동을 보여 이 나라의 기술과 산업을 선진화하는 데에 앞장서 왔다. 그러나 차츰 많은 것을 정부 출연에 의존하다보니 조직 내부에는 관료적 분위기가 감돌며, 경영이나 연구 성과에 대한 평가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출연 연구기관은 경쟁이 없는 무기력의 길로 접어들게 된 것이다. 또 창설초기에 많은 사람들이 부러워했던 복지나 처우도 출연이라고는 하지만 정부의 경직성예산에 의존하는 한 크게 개선될 전망이 없었다. 기술 개발도 60-70년대는 출연 연구기관이, 80년대는 국영 기업이,90년대에 들어서는 민간기업이 주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출연 연구기관이 수행하던 일들을 기업이나 대학이 할 수 있게 됐다. 이것은 기업은 기업대로 생존을 위해 연구개발에 힘썼고, 또 대학 역시 연구환경 개선에 많은 노력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기초과학 국방 원자력 환경 표준 등 공공성이 강하거나 민간기업이 할 수 없는 분야는 국립화하여 안정된 연구환경을 조성하는 것이 어떨까 생각했다. 여타 기관들은 연구개발 및 사업관리 인력을 개발하는 기능을 부가하거나,아니면 적자생존의 시장원리에 맡길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출연 연구기관들에 대한 평가를 ETRI(전자통신연구소) 부설 천문대와 운영의 편의상 기초과학 지원센터를 표준과학원에 통합하는 정도로 마무리하면서 G-7 프로젝트 등 주요 국책사업을 통합 관리하는 기능을 부가했다. 나의 과기처생활에 의의를 단다면 출연 연구기관들에 스스로를 조명할 기회를 준 것이며 부처 이기주의의 타파라고 할 수 있다. 이를테면 체신부 상공부간의 아날로그 디지털 논쟁, 또 과기처 동자부간의 핵폐기물처리장 사업, 과기처 체신부간의 ETRI 이관 등이 문제로 대두되었다. 그러나 부처를 초월해 디지털방식을 채택하도록 중재했고 ETRI를 체신부로 이관하는데 협력했다. 이 때문에 나는 체신부편을 든다는 소리도 들었지만 정보통신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의 소신을 밝힌 것이며, 결국 CDMA를 세계 최초로 상용화하게 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92년 여름 임기가 다가오는 KIST 원장직을 놓고 자천 타천의 이름이 나돌았다. 그런중에 어느날 갑자기 내가 내정됐다는 통보를 받았다. 그러나 나는 고사했다. 현임 원장의 유임을 믿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시한을 알고 있는 관직이라 내 나름대로 새 진로를 찾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때 KIST 이사장 이한빈 박사의 부름을 받아, 설득을 받고 결국 수락했다. 나는 92년 7월 KIST 원장으로 취임했다. 과기처에 있을 때 정부출연 연구소평가를 주관하여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 내가 원장으로 부임한다니, KIST 사람들은 환영보다는 거부감으로 긴장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솔직한 내 마음을 털어놓기 위해 과기처에서 작성해준 취임사를 제쳐놓고 밤새워 원고를 썼다. 취임사에서 나는 연구소가 걸리기 쉬운 병을 사람과 전쟁에 비유해 하나하나 지적햇다. 비유의 줄기는 두 갈래였다. 우선 사람에 비유했다. 사람이 늙으면 첫째 과식한다. 연구소도 과도한 연구자원을 요구한다. 둘째 비만이 된다. 연구소에도 노는 사람이 늘어난다. 셋째 수다를 떤다. 연구는 않고 남의 탓이나 언론 플레이를 하고 쓸모없는 보고서를 낸다. 넷째 번식능력을 잃는다. 연구소도 젊은 인력이 줄고 고령화된다. 과학기술자도 늙으면 경험에만 매달려 새로운 지식을 받아들이지 못해 낙오된다. 아인슈타인도 만년엔 양자역학을 인정하려 들지 않고, 보어와 논쟁을 했다. 또 다른 비유는 전쟁이다. 전쟁에서는 목숨을 걸고 적진을 돌파해야 승리한다. 그런데 사기가 떨어진 군대는 진지에 틀어박혀 전투식량이나 축낸다. 연구소도 미지에 도전하지 않고 연구비만 축낸다. 그 명성 높은 IBM의 왓슨 연구소나 AT&T의 벨 연구소가 한때 우수 연구소 순위에서 수십번째로 밀려난 사례도 환기시켰다. 출연 연구기관엔 비전이 없다고 좌절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분명히 말 할 수 있는 것은 출연 연구기관의 비전은 그 정관에 명시된 설립목적에 충실하려는 노력에 달려 있다. KIST 같으면 "본 연구소는 과학기술 및 공업(산업)경제에 관한 시험-연구 및 조사를 종합적으로 수행하고 그 성과를 보급함으로써 산업기술 개발에 기여함을 목적으로 한다"는 정신을 되살리는 것이다. 이보다 더 분명한 목적이 어디 또 있는가. 덧붙이자면 KIST는 이젠 대학과 기업에 없는 기능을 부가해야 하며, 또 기초연구도 산업사회의 변화를 인식하면서 발전시켜야 그 명맥이 유지된다. 과기처와 KIST 생활을 마치고나니 정보통신 분야의 일이 또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일복을 타고난 것이라 생각하고 옛 고향으로 되돌아 왔다. 그 사이에 통신보다는 정보라는 말이, 그리고 전화보다는 이동 통신이라는 말이 더 자연스럽게 들리는 변화가 있었다. 그리고 그 변화의 진폭만큼 나의 인생도 새로운 활기로 새 일을 벌이게 되었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10월 8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