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경제신문 창간32돌] 21C 신소비 : 제/판동맹..전략제휴

산업혁명 이후 기업들의 지상과제는 "어떻게 하면 낮은 비용으로 물건을 많이 생산할수 있는가"였다. "대량생산과 대량소비"가 특징인 근대사회에서 물건은 만들어 놓기만 하면 팔렸다. 수요에 비해 상품공급이 부족한 시기였기 때문이다. 당연히 다량의 상품을 생산, 낮은 가격에 판매하면 신규수요가 일어나고 생산비도 절감된다는 "규모의 경제" 논리가 기업경영을 지배했다. 수요에 비해 공급이 넘치는 현대사회에 접어들면서 기업환경은 급격히 변했다. 상품을 만들면 곧바로 팔려 나가던 시절은 지나갔다. 제조업체가 계열대리점 등을 통해 아무리 상품을 밀어내도 일단 소비자가 외면한 제품은 재고품으로 먼지만 쌓이다 반품처리되는 운명을 맞게 됐다. 그만큼 소비자의 수요와 기호를 정확히 예측하는게 현대 기업경영의 열쇠가 됐다. 제품을 생산한 뒤 유통망에 밀어내는 푸시(Push)형 경영에서 소비자의 수요만큼만 공급하는 풀(Pull)형 경영시스템으로 전환된 것이다. 소비자 우위의 경제구조하에서 주목받는 것이 제조업체와 유통업체가 상품개발에서부터 물류코스트 절감까지 전략적으로 제휴하는 제판동맹이다. 미국의 월마트와 P&G, 일본의 자스코와 가오 등 세계적인 유통업체와 제조업체가 맺고 있는 제판동맹은 공급과잉의 미래 소비사회에서 기업들이 어떻게 생존전략을 짜야 하는가에 대해 도전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다. 제판동맹의 출발점은 한마디로 "유통업체가 취득한 소비정보를 제조업체가공유해 이를 생산이나 판매 등 기업경영의 제반 분야에 적용하자"는 것이다. 생산자 우위의 시대에 제조업과 유통업은 어느 정도 대립관계에 놓여 있었던게 사실이다. 그러나 이제는 판매 현장의 최일선에서 소비자와 교감하는 유통업체를 외면하고는 제조업체가 생존하기 힘들게 됐다. 유통업체도 물류비용의 절감이나 PB (자체상표, private brand) 상품의 개발을 통해 가격파괴를 이루기 위해서는 제조업체의 절대적인 협조가 필요해졌다. 제조업체와 유통업체의 "행복한 밀월시대"가 열린 것이다. 제판동맹은 목적에 따라 "유통코스트 절감형"과 "상품개발형"으로 분류된다. 신세계 유통산업연구소의 노은정 대리는 "전자가 물류비용 절감 등을 위해발주나 납품에 드는 비용이나 재고량을 줄이는게 목표라면 후자는 가격이나품질면에서 경쟁력있는 상품을 개발하는데 중점이 두어진다"고 설명했다. 노대리는 또 "미국에서는 유통코스트 삭감형이, 일본에서는 상품개발형을 위주로 코스트삭감형이 부수되는 경우가 많은게 특징"이라고 지적했다. 제판동맹의 대표적 사례는 세계 최대의 유통업체인 미국의 월마트와 P&G가맺은 것이다. 양사의 동맹은 월마트가 인공위성이나 온라인컴퓨터를 통해 자사가 보유한판매정보를 납품업체에 제공함으로써 납기시간이나 물류를 개선하자고 제안한데서 시작됐다. 다국적 생활용품 제조업체인 P&G는 이에 동의, 60여명에 달하는 자사 직원을 월마트에 파견해 마케팅 물류 재무 등 기업경영의 전분야에 걸쳐 월마트와 철저히 협력하는 공조체계를 갖추었다. 이를 통해 P&G는 자사 제품에 대한 안정적인 판매원 확보는 물론 소비자의실수요및 장단기 트렌드까지 정확하게 파악할수 있었다. 월마트는 개개점포의 재고나 판매동향 등 각종 정보는 물론 지역물류센터까지 공개함으로써 재고량및 물류비용을 줄이는 한편 유통업체의 생명이나 마찬가지인 상품의 회전율을 크게 높일수 있었다. 일본내에서의 제판동맹은 94년 1월 대형 양판점업체인 다이에와 종합식품업체인 아지노모도에 의해 처음으로 시도됐다. 냉동식품과 식용유 우롱차 등 각종 PB상품을 공동으로 개발, 판매한것이다. 그해 5월에는 편의점 세븐과 미국의 필립모리스가 제휴했다. 또 자스코와 가오간의 자동발주시스템, 세븐일레븐과 아이스크림 제조 5개사의 제휴 등 제판동맹 사례는 늘어가고 있다. 일본의 제판동맹은 주로 PB상품의 개발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게 특징이다. 유통업체가 제조업체에 OEM(주문자상표부착생산) 방식으로 상품을 공급받은뒤 자사의 책임하에 판매하는 PB상품은 "가격파괴"의 핵심이다. PB상품은 일반적으로 TV 등을 통해 전국적인 광고를 집행하는 NB (유명브랜드, national brand) 상품과 품질은 비슷하지만 가격은 파격적으로 싼 게 특징이다. 국내에서도 "가격파괴" 또는 "유통우위의 시대"가 다가오며 제판동맹의 씨앗이 뿌려지고 있다. 백화점 슈퍼마켓 편의점 등 유통업체를 중심으로 PB상품의 개발이 활기를 띠고 있으며 현대백화점이 경기도 수지면의 한국물류를 통해 "총공급망관리"(SCM)를 선언하는 등 유통코스트형 제판동맹도 시작되고 있다. 제판동맹에는 아직까지 많은 과제가 남아있는게 현실이다. 물류코스트를 절감하기 위한 시스템의 구축에 오히려 전체적인 삭감효과보다 더 큰 비용이 들어가는가 하면 공들여 개발해 놓은 PB상품이 외면받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세계경제의 정보화 무국경화가 진행되고 가격경쟁이 치열해질수록 제판동맹은 더욱 늘어날 것이라는게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노은정 대리는 "국내에서도 프라이스클럽 E마트 등 할인점이 처음 등장했을 때는 제조업체들이 납품을 거부하는 등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며 "할인점이 늘어날수록 제조업체들이 유통업체와의 동맹관계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안진환 교수(동래여자전문대)는 "시장개방으로 세계도처의 값싸고 질좋은 상품이 들어오면 국내 기업도 필연적으로 저가경쟁에 휘말리게 된다"며 "국내의 가격파괴경쟁에도 PB상품의 개발이 필수적이며 특히 제조업 도매업소매업의 3자가 소비자정보및 판매기회를 공유하는 협력관계를 구축하는게중요하다"고 지적했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10월 14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