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경제 포커스] 아시아 경제를 일군 '6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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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가 세계에서 가장 역동적인 경제지역으로 발돋움하게 된 데는 걸출한 비즈니스맨들의 뒷받침이 컸다. 이들은 새시대를 열었을 뿐 아니라 새로운 기업제국을 탄생시켰다. 타임지는 최근 "아시아판 발행 50주년 특집호"에서 아시아를 빛낸 6인의 기업인을 선정했다. 정주영 현대그룹명예회장(81)을 비롯 홍콩의 리 카싱(68) 청콩그룹창업자, 모리타 아키오(75) 소니창업자, 말레이시아의 로버트 쿠옥 쿠옥그룹총수(73), 도요다 에이지(83) 도요타명예회장, 인도의 고JRD타타 타타손스그룹회장이 영광의 인물들이다. 이들 6명은 하나같이 불굴의 의지와 개척정신을 발휘,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어냈다. 정주영 회장 현대그룹 창업자인 정회장은 개인자산이 62억달러나 되는 한국 최대갑부이지만 소탈하고 겸손한 기업인으로 알려져있다. 드라마틱한 인생행로를 거치는 동안 몸에 밴 절약정신때문이다. 강원도 통천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초등교육밖에 받지못했다. 하지만 새로운 제국을 건설한다는 대망을 품고 지난 33년 무작정 서울로 떠났다. 막노동꾼과 쌀가게 종업원을 거친후 공구 한세트만을 가지고 자동차 수리소를 차렸다. 정회장은 지난 47년 오늘날 현대그룹의 모체가 된 현대건설을 세웠고 꼭 20년만에 미국 포드자동차와 자동차조립기술계약을 체결, 자동차산업에 뛰어들었다. 그후 87년 회장직에서 물러날때까지 세계에서 가장 경쟁력있는 조선소와 한국 최초이자 최대의 자동차회사를 일궈냈다. 정회장은 쓰다남은 건축재료로 만든 평범한 집에서 산다. 몇년전 건강악화로 경영일선에서 물러나기전까지만 해도 그는 매일 사무실까지 5km를 걸어서 출근하기도 했다. 이제 그에게 남은 과업은 현대그룹을 성공적으로 분리, 한국기업사에 커다란 획을 긋는 일이다. 리 카싱 청콩그룹창업자 "화교의 자부심"을 한층 끌어올린 홍콩재계의 거물인 리 카싱은 개인소유재산만도 59억달러에 달하는 세계에서 손꼽히는 갑부다. 그가 일으킨 청콩그룹의 자본규모는 홍콩전체 상장기업의 10%에 이른다. 그러나 "청콩"이 세상의 빛을 보기까지는 어린 소년의 눈물겨운 고생이 뒤따랐다. 소년 리는 12세되던 해에 부친을 잃고 생업전선에 뛰어들어야했다. 하루 16시간씩 플라스틱벨트와 손목시계줄을 팔러다녔다. 중국남부에서 홍콩으로 이민온지 2년후였다. 리는 그후 10년동안 땀을 쏟은 덕분에 22세가 되던 지난 40년에 플라스틱 머리빗과 비눗갑을 제조하는 회사 "청콩"의 간판을 내걸게됐다. 그는 많은 기업들이 과다한 부채로 인해 무너지는 것을 감안, 지주들에게 미래이윤에 대한 지분을 나눠주는 방법으로 무거운 채무부담을 피했다. 전문가 뺨치는 포커꾼으로도 알려진 그는 기업의 인수경매과정에서 능숙한 솜씨를 발휘, 청콩의 외형을 지금과 같이 부풀릴수 있었다. 모리타 아키오 일본에는 성공한 기업인들이 많이 있지만 일본을 전세계에 널리 알리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라면 소니를 탄생시킨 모리타 아키오가 단연 으뜸이다. 일본 나고야의 주류 양조집안에서 태어난 모리타는 청년시절에 물리학자의 길을 걸었다. 그러나 그는 세계 2차대전이 끝나갈 무렵 동료 과학자인 이부카 마사루를 설득, 단돈 375달러로 사업을 벌였다. 폭격으로 폐허가 된 백화점터에 자리를 잡고 "동경통신공업"을 설립,테이프녹음기를 만들어냈다. 그는 전후의 일본 소비자들이 성능좋은 가전제품을 살 형편이 못되는 것을 감안, 수출에 주력하는 사업전략을 택했다. 그리고는 미국시장을 뚫고 들어갈만한 강력한 "무기"를 개발해낸다. 그것은 바로 아무도 생각하지못했던 트랜지스터 라디오. 이때 모리타는 회사의 이름을 소니(소리를 뜻하는 라틴어 어원 sonus에서 따옴)로 바꾸고 초소형TV VCR(비디오카세트리코더)등을 생산하면서 일본 가전업계에 일대 회오리바람을 일으켰다. 그러나 소니그룹이 전세계로 뻗어나가게 된 계기는 뭐니뭐니해도 "워크맨"의 개발이다. 이부카가 천부적인 기술로 소니의 첨단제품을 놀라울 정도로 단순하게 만들었다면 소니의 이미지를 전세계적으로 보편화시킨것은 모리타의 탁월한 마케팅감각이다. 그는 동서양의 문화를 접목시키는 마케팅전략으로 "세계속의 소니"를 건설했다. 지난 93년 뇌출혈로 쓰러지기도 했던 그는 현재 75세의 나이로 하와이에서 여생을 보내고 있다. 로버트 쿠옥 조직및 인간관계에서 말레이시아의 로버트 쿠옥 쿠옥그룹총수만큼 특출했던 기업인은 찾아보기 힘들다. 그의 사업동료는 인도네시아재벌인 리엠 리옹에서부터 코카콜라의 최고경영진들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그는 또 중국의 지도부에도 잘 알려진 인물이다. 중국에서 비즈니스가 성행하기 몇십년전부터 중국에 진출했으며 코카콜라와 함께 중국에 합작공장을 설립하기도 했다. 중국에서 이미 8개의 호텔을 운영중인 쿠옥그룹은 조만간 중국 최대의 초호화 호텔을 세울 예정이다. 지난 70년 말레이시아에서 설탕중개업으로 도약의 발판을 마련한 쿠옥그룹은 47년만에 아시아에서 손꼽히는 대기업으로 성장했다. 광범위한 인맥과 사업파트너를 활용, 설탕 및 팜유생산에서부터 금융서비스 및 호텔사업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업을 벌이고 있다. 쿠옥그룹의 샹그리라 인터내셔널 호텔(SLI)은 오는 2000년까지 동아시아에 45개의 체인망을 구축할 계획을 세워놓고 있다. 도요다 에이지 무명의 도요타자동차를 세계 제3위 자동차메이커로 키워낸 인물은 지난 35년 자동차제조업을 시작한 도요다 키치로의 사촌 도요다 에이지이다. (지난 38년 이회사의 이름은 도요다에서 도요타로 바뀌었다) 도요타자동차는 세계 2차대전까지는 일본군용 트럭을 만들었다. 승용차산업을 벌이게 된 것은 지난 50년 도요다 에이지 현 도요타명예회장이 포드의 미시간주소재 자동차공장을 방문하고 나서부터다. 도요다명예회장은 그후 60년대말까지 도요타자동차를 값싸면서도 믿을 만하며 재고가 쌓이지않는 회사로 키웠다. 지난 73년부터는 세계 석유파동에 힘입어 연료절약차를 생산,자동차왕국인 미국시장을 파고들었다. 당시 도요타만큼 마케팅과 생산을 능숙하게 해낸 기업은 없다. 미국 연방정부의 배기가스기준 준수요구에 대해서는 1년간의 유예기간을 얻어냈다. 1년뒤에 도요타자동차는 오염방지설비면에서 미국자동차보다 월등한 제품을 만들어내 이미지변신에 성공했다. 고J R D 타타 부패가 만연한 인도재계에서 JRD타타 타타손스그룹회장은 정직과 성실함으로 이에 맞서온 기업가로 통한다. 타타손스그룹은 지난 38년 JRD회장이 34세의 나이에 조부로부터 물려받기전까지는 강철 의류 및 항공사업을 주력사업으로 해온 100년역사의지주회사였다. JRD회장은 경영일선에 뛰어든후 직원들이 주인의식을 갖도록 자율권을 최대한 보장하고 자동차 비료 통신서비스등의 새로운 분야에 뛰어들었다. 그의 이러한 경영방침에 힘입어 타타손스사는 13개 계열사에서 80개이상을 소유한 인도 최대의 기업으로 성장했다. 현재 타타손스그룹은 트럭및 기관차 제조, 시계및 화학관련 산업에서도 독보적인 입지를 확보하고 있다. 독재적인 경제정책으로 유명한 인도에서 JRD회장이 이렇게 기업을 키워내기는 쉽지않았다. 인도의 관료들은 수십년간 허가와 라이선스등으로 업체들을 묶어놓고 과잉 생산이나 사업확장에 대해 벌금을 부과하는등 제동을 걸어왔다. 지난 93년 JRD회장은 89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인도정부가 뒤늦게서야 규제조치를 완화한 직후였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10월 28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