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루몽] (574) 제12부 낙엽 진 뜨락에 석양빛 비끼고 (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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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 리 없어. 난 보채 누이랑 혼인하지 않았어. 대옥 누이랑 했단 말이야!" 보옥이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며 고함을 질렀다. 그 고함소리에 보채가 흠칫 놀라며 금방이라도 울음이 터져 나올 것처럼 울상을 지었다. 새벽녘에 일어난 그런 소란의 낌새를 눈치챈 희봉이 대부인, 왕부인과 함께 조심스럽게 신방문을 열고 들어가 보았다. 습인도 곧 뒤따라 들어갔다. 대부인은 보옥에게로 급히 다가가 그 얼굴을 들여다 보았다. 보옥은 보채에게 고함을 지르고는 다시 어진혼 나간 표정을 하고 있었다. 할머니인 대부인이 자기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다는 사실을 보옥은 의식하지 못하고 있는 듯했다. 그런데 습인에게 시선이 닿자 습인은 알아보는 눈치였다. "대옥 누이는 어디 있지?" "어디 있긴요, 소상관에 있지" 습인이 소상관 쪽을 손으로 가리키며 안타까운 어조로 대답했다. "나,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건가?" 보옥이 보채를 흘끗 쳐다보며 혼자말처럼 중얼거렸다. "꿈을 꾸긴요, 도련님은 경사스러운 혼인을 치르고 첫날밤을 보내셨잖아요" 습인이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 습인의 눈물에는 많은 뜻이 숨어 있는 셈이었다. 평소에 보옥과 몸을 섞곤 했던 습인으로서는 보옥이 신부와 교합한 첫날밤의 의미가 남다르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런데 보채 누이가 왜 여기에 와 있는 거지?" 보옥이 멍한 눈길을 돌아앉아 있는 보채에게로 보냈다. 왕부인이 희봉에게 눈짓을 하자 희봉이 보채를 데리고 신방을 나가 별채 안방으로 건너갔다. 보채는 안방으로 들어서자 그제야 참았던 울음을 터뜨리며 방바닥에 주저앉았다. 희봉은 어떻게 위로할 말을 찾지 못하고 보채를 등뒤로 꼬옥 껴안아줄 뿐이었다. 보채는 어깨를 들먹이며 흐느끼다가 그것도 멈추고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이고만 있었다. "아무래도 이 아이가 다시 정신이 어렵게 된거야. 희봉의 말대로 했다가 오히려 일이 잘못되었구나. 아이구, 이 일을 어쩌나" 대부인이 보옥의 동태를 살펴보다가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어머님, 너무 성급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일단 금의 인연과 옥의 인연이 합해졌으니 결과를 두고봐야지요. 금이 옥을 어루만져 온전하게 해준다고 했으니까요" 왕부인이 자기도 걱정이 되면서도 대부인을 위로하느라 애를 썼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11월 15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