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여록] 민원에 떠밀린 정책

첫 단추를 잘못 끼우면 마지막 단추는 끼울 데가 없다. 요즘 서울시를 보면 이 말이 절로 떠오른다. 잠실등 5개 저밀도아파트지구에 대한 계획이 14일 전격적으로 발표됐다. 최고 25층까지 재건축을 허용한다는 내용이 골자다. 사실 이들 지구의 아파트단지는 준공된지 20년가량된 노후 건물이다. 화장실도 좌변식이 아닌 구식 수세식이 대부분이다. 따라서 주민들의 재건축 요구는 거셌다. 이런 면에서 언뜻보면 이번 방침이 사유권을 보장하고 민의를 적절히 수렴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냉정하게 생각해 보면 그 배경에 대한 의문이 진하게 남을 수밖에 없다. 지난 4년간 옥신각신하며 고층화를 둘러싸고 재건축을 불허하던 서울시가 이처럼 태도를 돌변한데 의아심이 생기게 마련. 주거환경보호를 위해 과밀개발을 억제한다던 서울시의 방침은 한마디 해명도 없다. 민간위주의 재건축사업이라는 말만 내세울뿐 5만가구의 절반이 넘는 세입자에 대한 대책은 더더욱 없다. 우연인지는 몰라도 이같은 서울시의 선심행정은 시내버스비리가 터진 이후봇물을 이루고 있다. 사건직후인 지난 2일에는 부도심정비계획이 나왔다. 구릉지아파트의 층고제한완화방침이 발표된 것도 불과 며칠전이다. 한마디로 인기회복을 위한 선심성 정책이 아니냐는 의구심을 더욱 짙게 하는 사례들이다. 특히 도시전체에 큰 영향을 미칠수 있는 민원관련 주택정책이 잇따라 완화됐다는 점에서 문제의 심각성은 더 크다. 앞으로도 서울시는 도시계획과 관련한 숱한 난제를 풀어야 한다. 하지만 이런 대응방식이라면 문제는 오히려 더 꼬일께 뻔하다. 한번 터진 봇물은 쉽사리 막을수 없는게 세상이치이기 때문이다. 서울에는 1천1백만명이 살고 있다. 시가 민원 때문에 뒷걸음질치며 첫 단추부터 잘못 끼운다면 결국 피해는 전체 시민에게 돌아온다. "인간중심의 환경친화적 도시"를 만들겠다는 조순시장의 의지가 약해진 것아니냐는 우려를 떨칠수 없다. 김준현 (한국경제신문 1996년 11월 16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