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삶의 질과 정신개혁..김우식 <연세대 교수/화학공학>

요즈음 싸늘한 바람에 흩날리는 나뭇잎을 보느라면 마음이 어둡고 황량해지는 것을 새삼 강하게 느낀다. 계절 탓이라고 생각되기도 한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 주변에 펼쳐지는 여러 가지 답답한 일들, 경제사정이 어려워지고 도산과 실직이 늘어나며, 크고 작은 비리와 부정부패, 그리고 반윤리적 비도덕적 양상들, 상식 밖의 일들이 쉴새없이 터져나오는 것을 볼 때 이제는 무겁고 어두운 마음보다는 강한 분노와 배신감과 함께 차라리 "노아"의 홍수라도 다시 퍼부어서 이 모든 것들을 싹 쓸어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마저 든다. 오늘의 사회비리현상과 무질서는 어디서부터 어떻게 손을 대야 할지 막막한 생각이 든다. 정치 행정 교육 문화 종교 산업 등 어느 분야 가릴 것 없이 참으로 문제투성이고 파렴치하고 부끄러운 일들이 너무나 많이 생긴다. 누구 할 것 없이 우리 모두가 숲전체를 보지 못하고 나무만 보고 자기것만 챙기면서 책임의식 없이, 중심을 잃고 그저 허둥대면서 흘러가고 있는 것 같다. 일전에 어느 신문보도에서 선진국 삶의 질을 100점이라고 했을때 우리의 삶의 질이 4점(?)이라는 통계를 보고 깜짝 놀란 일이 있다. 그 정량적 값의 근거는 모르겠으나 분명한 것은 소위 한강의 기적을 이루었다는 우리의 삶의 질이 형편없이 평가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분명 우리의 경제규모나 국력은 괄목할만큼 신장됐고 선진국 진입을 눈앞에 두고 있다. 향후 10년간의 GDP는 16~25% 상향될 전망이며, 경제성장률도 7%정도 예상되고 있다. 나쁜 숫자는 아니다. 피부로 느끼는 것만 보더라도 외제 차가 흔하게 굴러다니고 몇 십억짜리 빌라들이 매진되었다고 한다. 우리의 의식주생활은 높은 수준으로 올라섰다. 오히려 과소비를 걱정하는 소리까지 나온다. 골프장은 주중에도 연일 만원이다. 세계 여행객 중에서 가장 돈을 잘 쓰는 국민이라는 말을 듣는다. 몸에 좋다는 보약은 값에 관계없이 우리 나라 사람들이 싹쓸이를 한다. 오죽하면 천연기념물로 몇 마리밖에 없다는 "지리산" 반달곰의 곰발바닥과 간을 먹으려고 허덕이는 사람들 때문에 또 어느 순간에 멸종할지 모르는 위험에 처해 있다. 이같은 외형적 상황을 보면 우리의 삶의 질이 상당히 높은 것으로 생각될 수 있다. 그러나 실제 평가는 바닥으로 떨어져 있는 것이다. 잘 먹고, 잘 입고, 좋은 집에 살고, 고급차 타고, 값비싼 보약을 들고... 이런 것만이 곧 "잘사는 것"은 아니다. 삶의 질은 두 가지로 구분된다. 첫째는 풍족한 의식주 생활, 즉 다양하고 풍요로운 물질적 생활을 바탕으로한 유형의 물리적 삶(A)이다. 높은 양식과 규범의식, 즉 숭고한 윤리와 도덕을 바탕으로 한 무형의 정신적 삶(B)은 또 다른 삶의 질이다. 따라서 총체적 삶의 질을 Q라 한다면, Q는 A와 B의 상승적, 즉 Q=AB로 나타낼 수 있다. 아무리 풍족한 생활(A↑)이라 하더라도 정신적 삶이 바닥(B=0)이면 Q는 0이다. 물론 아무리 정신적 삶이 고고(B↑)하더라도, 배고프고 헐벗으면(A=0),Q는 또한 0이다. 때문에 총제적으로 높은 삶의 질은 A와 B가 균형 있게 조화를 이룰 때 가능하다. 우리가 아무리 땀흘려 경제국가를 이룩했다 하더라도 정신상태가 이기적이고, 부도덕하고, 부패해버리면 우리의 정신적 삶의 질은 0이 되고 결국 총채적 삶은 못사는 결과가 돼버린다. 나날이 심각해져가는 교통혼잡과 환경오염만 보더라도 우리의 무질서하고 저급한 정신상태 의식수준을 짐작할 수 있다. 더욱 기가 막힌 것은 소위 고위층과 지식층, 그리고 가졌다는 사람들이 "부끄러움"에 대한 불감증에 중증으로 걸려 있다는 사실이다. 대통령이나 사정기관의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법에 의해 준엄하게 다스리겠다"는 말을 수없이 들어왔다. 바로 그 등잔밑에서 엊그제 국방총수가 버젓이 부정을 저지르고, 곧이어 복지총수가 악취를 풍기며 석연찮게 물러났다. 뿐만 아니라 도덕성 윤리성의 기준이 되어야 하는 교계나 학계, 그리고 상아탑 안에서조차 부정과 비리, 거짓말과 모략이 횡행할 때 우리의 정신적 혼미는 진정 감내하기 어려운 것이다. 법의 심판대에 서있는 재벌총수들이 모습은 허탈하고 비통하기 그지없다. 어린아이들의 우상이던 뽀빠이 사건은 차라리 연민의 정마저 든다. "우리 나라에서 존경할 사람, 아니 존경할만한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내뱉던 어떤 선배의 말이 새롭다. 중소기업을 경영하는 친구가 그랜저를 타다가 어느날 "제규어"를 타고 나타났다. 웬 일이냐고 물으니까 "어차피 벌어봤자 세금이다 뭐다 다 나갈바엔 차라도 고급으로 타보자는 오기로 샀다"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총체적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 우리의 의식부터 우리의 정신부터 개혁해야 되겠다. 누구에게 책임을 물을 수도 없다. 우리 모두의 책임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정신개혁은 우선 충격요법을 써서라도 이뤄져야 한다. 중국 장개석 총통이 무질서를 바로잡고 국가기강을 바로 세우기 위해 부정을 저지른 친.인척을 정부청사 앞에서 공개 처형했다는 이야기는 타산지석일 수도 있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11월 25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