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파일] 국악가수 김용우씨 .. '우리민요에 새생명 심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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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이 지루하고 고리타분한 것이라고? 그러나 단연코 "아니올시다"라고 대답하는 사람이 있다. 국악대중화에 자신의 젊음을 내던진 "젊은 국악가수" 김용우씨. 그는 "젊은이들이 국악을 따분하다고 생각하는 건 국악이 정말로 재미없어서가 아니라 국악을 접하고 즐길수 있는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그의 나이 28세. 국악계에서는 그야말로 "머리에 피도 마르지 않은" 햇병아리다. 천연염료로 물들인 개량한복에 살짝 묶은 꽁지머리. 언뜻 겉모습만 보면 여느 신세대 못지않은 파격적인 차림새다. 하지만 그속에는 새로운 것을 갈구하는 패기만만한 도전의식과 다양한 실험정신이 짙게 배어있다. "우리 옛소리를 많은 사람들이 즐길수 있도록 현대 감각에 맞게 재해석하는 것도 모두 전통의 재창조요 계승입니다. 제가 입는 개량한복처럼요. 관객없는 예술은 존재할수도, 이어질수도 없어요" 그는 대여섯 가지의 닉네임을 달고 다닌다. 그만큼 다재다능하다는 얘기다. 직접 작곡 편곡을 하는가 하면 어릴때부터 익혔던 피리 장구 피아노 솜씨도 프로급이다. 91년 서울대 국악과 재학시절엔 중요무형문화재 제41호 12가사의 이수자로 지정됐다. 여기에 공연 사회자로 혹은 라디오방송 진행자로 나서 관객과 청취자의 흥을 돋우는 재담 실력은 전문 MC를 무색케 한다. 그의 출생과 성장과정을 들여다보면 그와 국악의 만남은 운명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가 태어난 충북 영동은 바로 조선 세종때 아악을 정리한 난계 박연의 고향이다. 드넓고 기름진 국악의 대평원에서 그의 인생은 팔자처럼 정해졌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진정으로 그를 국악의 길로 이끈 것은 타고난 끼와 다재다능함이었다. 중학교때 혼자서 교본도 없이 1년간 익힌 피리솜씨로 전국 국악경연대회 중등부 대상을 차지했다. 서울 국악고등학교에 진학, 본격적으로 국악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86년 서울대 국악과에 입학한후 그는 음악인생의 전환점을 맞는다. "소리사위"란 팀을 결성하고 노래패 "메아리"에서 활동하면서 그의 음악은 악기연주에서 노래로 변하기 시작했다. 대중가요의 위력도 그의 방향전환을 부추기고 있었다. 결국 대학 2학년 여름에 농촌활동에 참가해 시골 촌로들의 노래를 듣는순간 그는 국악가수로 방향을 정했다. 이때부터 그는 우리나라의 잊혀져가는 토속민요를 찾아 틈나는대로 전국을 들쑤시고 다녔다. 할아버지 할머니와 함께 논밭에서 일도 거들고 막걸리잔을 기울이며 덩실덩실 어깨춤도 추면서 며칠을 묵기도 했다. 그들의 거친 숨소리가 밴 노래를 그 자리에서 암기하고 몸으로 느끼고 돌아오곤 했다. 그렇게 7년동안 채집한 토속민요가 300여곡. 혼자 간직하기에는 너무 아까운 보석상자였다. 그래서 지난해부터 소중한 보석상자에서 8곡을 꺼내 새로 옷을 입히기를 1년. 드디어 지난 6월말 "김용우의 지게소리"라는 첫 독집앨범이 세상의 빛을 보게 됐다. "민요에는 독특한 매력과 풍자가 배어 있어요. 우리사회에 만연하는 갖가지 병리현상에 대한 명쾌한 해법이 담겨 있지요. 우리 조상의 지혜가 녹아있는 토속민요는 땀의 의미와 공동체의 소중함을 일깨워줍니다" 그러나 원형대로 내놓으면 신세대에게 외면당할 것은 불을 보듯 뻔했다. 그래서 파격적인 실험을 감행했다. 충남 태안 고성규씨로부터 배운 "지게소리"에는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가미했고 제주도 봉"봉지가"에는 신디사이저와 단소 반주를 곁들였다. 충남 홍성의 "논매기노래"와 "군밤타령"은 아카펠라 합창으로 편곡했고 진도의 "강강술래"는 메김소리를 코러스로 처리했다. "1집은 신고식이고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입니다. 5집까지 낸다는 목표로 1년마다 새로운 스타일의 음반을 꾸준히 만들 거예요. 우선 2집에는 토속민요 5곡외에 국악과 재즈등 대중가요 장르를 접목한 신작 5곡을 담을 생각입니다. 랩이나 레게같은 대중음악보다 더 히트하고 젊은이들도 즐겨 부를수 있는 노래가 될 겁니다" 고전을 들고 신세대속으로 파고드는 그의 옹골진 외침이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12월 2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