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박성득 <정보통신부 차관> .. '41년 한우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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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난사람 = 김형근 정보통신부장 ] "체신고졸.키 154cm.별명 리틀 자이언트" 지난해말 개각때 정보통신부차관에 임명된 박성득차관(58)에게 붙어다니는 수식어다. 박차관은 많은 사람들에게 입지전적인 인물로 알려져있다. 지난55년 국립체신고등학교 3기로 입학해 지난 41년간 통신과 함께 해온 그의 공직생활은 그 자체가 한국정보통신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박차관이 1백만명에 달하는 통신가족뿐아니라 여러분야의 사람들로부터 많은기대를 받고 있는 것도 그의 이같은 이력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수있다. 그는 5척 단구에도 불구하고 당차다는 평을 들어왔다. 지난 92년 제2이동통신사업자선정때는 심사평가단장을 맡아 적어도 행정 실무적으로는 아무런 하자없이 무난히 소임을 다했다. 최근에는 초고속정보통신망 구축계획을 입안했으며 기획관리실장으로서 통신가족의 뒷치닥거리를 잘해냈다는 평가도 듣고있다. 박차관의 입지전은 국립체신고등학교 입학과 함께 시작됐다. 58년 졸업과 동시에 서울 중앙전화국 임시기원(9급)으로 부임하면서 공무원 생활에 발을디뎠다. 고졸에 말단 전화국직원이 같은 부서의 차관에 오르기까지 무려 38년이 걸렸다. 박차관은 중앙전화국에서 일하면서 66년 성균관대 물리학과를 졸업하고 곧바로 한양대 산업대학원 과정을 밟았다. 그는 그러나 꿈에 그리던 대학졸업에만 만족할수는 없었다. 한단계 도약하기위해서는 새로운 계기가 필요했고 70년에는 제5회 기술고시에 합격했다. 공무원생활 12년만에 사무관을 단 마음은 지금도 잊을수 없다고 박차관은들려줬다. 그는 이때부터 영등포전화국 기술과장, 청와대 경호통신지원반근무를 거쳐 중앙전파감시소장(84년), 전파관리국장(90년),초대 통신정책실장(91년), 기획관리실장(94년)등 체신부와 정보통신부의 요직을 두루 거쳤다. 박차관은 "지난89년 시내전화에 3분단위의 요금개념을 도입한 시분제의 실시와 공공재인 전파에 사용료를 걷도록 한 것"이 가장 기억에 남고 보람있었던 일이라고 소개했다. 또 "지난92년 선정된 제2이동통신사업자와 10개지역무선호출사업자중 한 업체가 당시 정치적여건으로 사업권을 반납하는등 문제가 됐던 점은 지금도 아쉽다"고 밝혔다. 가장 어려웠던 시기로는 미국이 우리나라를 통신분야 우선협상대상국(PFC)으로 처음 지정했던 89년이라고 꼽았다. 박차관은 "지난41년간 국내 정보통신의 수준은 놀라운 속도로 향상됐다"고회고했다. 그는 "처음 중앙전화국에 파견돼 교환기운영을 도와주던 미고문단실에서 근무할당시 미국인의 월급은 한국직원의 1백배정도인 2천달러였다"며 "그러나 이들이 기술을 전수해 주지않아 몰래 교환기설명서를 일일이 손으로 베끼는등 눈물겨운 일이 많았다"고 들려줬다. 또 "60년대는 교환기 조작법만 알아도 유명세를 타던 시절이었으나 70년대 국내기술로 기계식교환기를 개발하고 80년대에 전자식교환기를 국산화했다"고 국내 정보통신사를 간략히 소개했다. 그는 "앞으로 원활한 정보의 유통기반을 마련해 정보산업의 발전을 통한 국가경제의 도약을 이루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또 "통신사업자는 각 분야의 기술개발과 서비스향상에 주력해야 할 것"이라며 "경쟁을 이유로 반목하는 통신업체들이 있으면 정보통신계에서살아남을 수 없다는 점을 명심해야 할것"이라고 강조했다. 박차관은 마지막으로 "국내에 이렇다할 정보통신인명부가 아직 없는 것이 안타까워 재직중 번듯한 인명부를 하나 만들어볼 생각"이라며 말을 맺었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1월 15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