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자격루 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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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날 새 물시계를 쓰기 시작했다" "세종실록" 1434년 (세종16년) 7월1일조에는 이렇게 시작해 새 물시계인 "자격루"의 구조와 작용을 자세히 설명한 대목이 나온다. 장영실 등이 제작한 이 시계는 물통속의 잣대가 부력에 따라 떠오르다가 정해진 시각이 되면 격발장치를 건드려 쇠구슬이 굴러내리면서 작동이 시작된다. 일단 굴러내린 쇠구슬은 연쇄적으로 다른 쇠구슬을 굴러내리게 만들어 여러가지 운동을 일으키게끔 세밀하게 고안된 시계였다. 물시계 한쪽에는 목각인형 3개를 만들어 세워 각기 시를 알리는 종,경을 알리는 북, 점을 알리는 징을 치도록 했다. 그 밑에는 시간을 알려주는 12간지의 신을 배치해 시간을 알려주는 패를 들어올리게 했다. 예를들어 자시가 되면 자신상이 시패를 들고 솟아올랐다가 내려가도록 되어 있었다. 세종은 자격루를 경복궁의 경회루 남쪽에 보루각이라는 보호각을 지어 설치했다. 한밤중에도 자격루가 저절로 울리면 그 북소리를 듣고 광화문의 문지기들이 똑같이 북을 쳐서 서울사람들에게 시간을 알렸다. 이를테면 자격루는 조선초의 표준시계였다. 그러나 지금 이 자격루의 흔적은 찾아 볼 수 없다. 그 대신 1세기후인 1536년 (중종31)에 다시만들었던 자격루의 물통들이 국보 제229호로 지정돼 1만원짜리 지폐에 도안돼 들어가 있고 이것을 통해 세종때 자격루의 모양을 짐작해 볼 수 있을 뿐이다. 문체부가 경복궁내 원래 그 자리에 자격루와 보루각을 오는 99년까지 복원하기로 했다는 소식이다. 이를위해 건국대 한구긱술사연구소는 가로 3m, 세로 6m, 높이 5.5m의 자격루 기본설계를 끝내고 모형까지 제작했다고 한다. 물시계는 이집트에서는 기원전 15세기, 중국에서는 주나라때인 10세기께 이미 고안돼 쓰였던 문명의 이기였다. 우리나라에서도 신라의 성덕왕 17년 (718)에 처음 루각을 만들엇다는 기록이 "삼국사기"에 나온다. 사료를 종합해보면 자격루는 중국에서 만든 물시계를 참고한 것으로 보이지만 정확히 어느것을 모델로 한 것인지, 어느정도 독창성이 있는지는 분명치 않다. 복원에 앞서 과학사학자들의 더 명확한 고증이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1월 23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