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리마다 규찰대 .. 김영진씨 등 탈북가족 기자회견

북한은 탈북자가 늘어나자 각 동.리마다 규찰대를 편성, 밤낮으로 순찰을 실시하는 등 주민들에 대한 여행통제를 대폭 강화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또 "죽 두끼먹기 운동"을 벌일 정도로 식량난이 최악의 상황에 이르렀으며 전력난으로 일반 가정에 제한송전하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지난 22일 중국을 경유해 인천항으로 귀순한 김영진씨와 유송일씨 가족 8명은 29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이같이 말했다. 김씨는 "과거에는 통행증만 있으면 여행이 가능했으나 최근에는 안전원과 인민반장에게 사전 보고를 해야 돌아다닐 수 있다"고 말했다. 또 동리마다 5명으로 구성된 규찰대 3개조가 순찰을 실시하고 밤 10시이후에는 휴대품 검색을 실시하고 있다고 증언했다. 김씨의 처 김찬옥씨는 "두끼 죽먹기 운동 등을 지난 95년 12월부터 실시하고 있다"고 말하고 "경제가 어려워지면서 공장가동률이 떨어져 노동자의 한달노임이 쌀 1kg 값(암시세 60~1백80원)에 못미치는 70~80원으로 떨어졌다"고 밝혔다. 유송일씨는 청진시의 경우 지난 92년부터 저녁 8시에서 새벽 4시까지 전기가 공급되지 않아 주민들이 양초를 사용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편 이날 기자회견 결과 당초 김일성의 처 김성애의 둘째동생인 김성갑과 사돈으로 알려졌던 김씨는 사실상 촌수를 따지기 어려운 먼 인척관계인 것으로 나타났다. 다음은 귀순자 가족 일문일답. -귀순과정에 대해 의혹이 일고 있다. 옷차림이라든가 여러가지로 미뤄 22일 이전에 귀순한 게 아닌가. 김 =지난해 3월 북한을 탈출한 뒤 남한으로 가기 위해 농촌과 식당등에서 일하며 돈을 모았다. 다행히 여러사람의 도움으로 남한에 오게 됐다. 옷차림이 화려했던 것은 탈북자라는 표를 내지 않기 위해 밀항을 도와줬던 사람들이 남루한 옷 대신 깨끗한 것으로 사입혀줬기 때문이다. -귀순시점이 분명치 않다. 김 =배선창 밑에 숨어왔기 때문에 시간개념이 없었다. 어느날 선원이 풍랑으로 늦어졌다고 말하며 내리라고 했다. 섬에 내려 지나가는 배에 구조요청을 했다. 큰 배에서 보트를 타고 온 사람들이 어디서 왔느냐고 묻는데 배에 쓰여진 글자가 북한 글자와 달라 한국에 왔다고 생각했다. -김성애의 남동생과 사돈이라는 소문이 있는데. 김 =그렇지 않다. 북한 고위층이라면 한국 입국이 쉬울 것같아 중국에서 그렇게 소문냈다. -해광군(아들)이 일기를 쓰게된 배경과 출처는. 김해광 =두만강부근에서 방랑생활을 시작할 때 먼훗날에도 잊지않으려고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중국체류당시 "한국의 선생님"들이 일기를 가져간 적이 있다. 그 후 다른 선생님들도 일기를 가져가려고 해 형과 어머니가 내 일기를 베껴서 건네줬다. 한편 이날 기자회견에서 유송일씨는 "상급자인 경리부 합장과 다퉈 출당당한 게 직접적인 귀순동기"라고 밝히고 "당초 어머니와 처도 같이 중국으로 들어왔으나 북경의 한국 대사관에서 도와줄 수 없다고 하자 처는 북경역에서 사라졌고 어머니는 중국에서 돌아다니는 사이에 심장병으로 돌아가셨다"고 말했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1월 3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