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 정치와 경제의 분업 .. 이영선 <연세대 교수>

한국경제가 흔들리고 있다. 지난해 2백억달러가 넘는 사상 최대의 경상수지 적자를 기록하더니 엎친데 덮친격으로 국회에서의 노동법 "날치기"통과로 우리 역사상 최대규모의 파업이 감행되었다. 그도 부족하다는 듯이 5조원의 은행빚을 진 대기업이 다시 사상 최대의 부도사태를 일으키고 말았다. 일반국민들은 그저 허탈할 뿐이다. 왜 이렇게 된 것일까. 정부가 국제경쟁력을 높이겠다고 온갖 정책수단을 마련, 구사해 오고 있음에도 이런 결과가 초래된 이유는 무엇인가. 필자는 한마디로 그 이유를 우리나라의 정치와 경제의 역할분담이 명확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규정하고 싶다. 다소 편향된 주장을 편다면 정치의 비선진성이 오늘 우리 경제의 어려움을 초래한 근본 원인이라 할 것이다. 선진국치고 정치와 경제의 역할분담이 불명확한 나라는 없다. 모든 선진국들은 정치적 민주화와 경제적 성장을 동시에 이루고 있는데 이 두개의 선이 동시에 성취된 배경에는 정치와 경제의 명확한 역할분담이 있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정치는 법과 질서를 만드는 역할을 담당한다. 물론 정치가 만들어내는 법과 질서는 온국민들의 경제적 삶이 보다 안정되고 윤택하게 하는 방향으로 제정되어야 한다. 이때 이 법과 질서가 국민들에 의해 받아들여질지는 그 법과 질서의 공평성에 의해 좌우된다. 경제는 국민들로 하여금 정치에 의해 만들어진 법과 질서를 토대로 하여 각자의 능력을 발휘해 최대한의 자기이득을 추구하게 함으로써 궁극적으로 온 국민의 후생을 증대시키는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우리는 바로 이러한 정치와 경제의 역할분담에서 실패하고 있는 셈이다. 노동법개정에 따른 일련의 사태전개 과정에서 우리는 정치가 제임무를 다하지 못하고 있음을 실감하게 된다. 내용의 적절성여부에 관계없이 민주적 절차가 무시된 채 개정된 노동법은 국민 다수에 의해 받아들여지기 힘들다. 여당의 지도층이 국민의 다수가 영향을 받게 될 노동법의 "날치기"통과가 어떤 정치 경제적 파급효과를 가져올 것인가에 대한 예측능력도 지니지 못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똑똑히 보았다. 우리가 진정코 오늘의 정치인들에게 법과 질서를 제정할 임무를 맡길 수 있을지 의문이 간다. 정치가 자기의 영역을 넘어서서 경제를 혼란시키고 있다는 사실은 한보사태를 통해 또다시 밝혀질 것으로 보인다. 정치권의 누가 금융기관에 압력을 행사했는가는 차치하더라도 금융기관 본연의 기능인 기업에 대한 심사과정이 무시된 채 거대한 금액의 대출이 자행되어 왔다는 사실만으로도 정치 혹은 정부가 경제에 얼마나 불공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가를 알 수 있다. WTO(세계무역기구)가입은 외부의 힘을 빌려 국내경제의 비효율화 원인이 되어오던 많은 규제를 철폐하고 경제를 개방화 자유화하여 우리 경제의 경쟁력을 높여보자는 의도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 이러한 시도는 열매를 맺지 못하고 있다. 2년전 WTO가 활동을 시작한 이후 세계무역은 급속도로 증가하고 있다. 3% 미만의 성장률을 보이던 세계무역 규모가 지난 94년 이후 평균 14%의 성장률을 보이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세계시장의 호조건속에서도 우리나라는 엄청난 무역적자의 늪에 빠져들고 있다. WTO라는 외압에 기대어 국내경제의 자유화를 시도하려 하고 있지만 정부의 규제와 간섭에 의한 비효율은 제거되지 못하고 있는 현실 때문이다. 이제 우리가 함께 풀어야할 문제는 명확해진다. 정치와 정부의 영역에 명확히 선을 긋고 정치가 경제의 영역을 침범하지 못하도록 통제하지 아니하고서는 우리 경제는 선진화될 수 없다. 지금까지 정치의 힘을 빌려 교육을 개혁하고, 노사관계를 개혁하고, 이제는 금융을 개혁하겠다고 하지만 정작 개혁해야 할 것은 정치와 정부다. 정치와 정부는 경제에 대해서는 공정한 법과 질서를 공급하는 일만 수행해야 한다는 정치에 관한 법과 질서를 세워야 한다. 정치나 정부가 자신의 영역을 넘어서서 경제를 간섭함으로써 국민경제에 큰 혼란을 줄 경우 이에 대한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정치제도도 만들어져야한다. 경제에서는 잘못 투자할 경우 부도와 파산이라는 책임을 감수하게 된다. 하지만 정치에서는 잘못을 저질러도 도대체 책임을 지우는 제도가 없다. 노동법의 "날치기"통과로 온 국민이 어려움을 겪고 있는 데도 어느 누구하나 책임을 지겠다는 사람이 없다. 책임이 밝혀지기 어려운 한보부도사태에 대해서는 더더욱 책임지려는 사람이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정치와 정부가 선진화되지 아니하고는 우리의 경제도 선진화 될 수 없다. 이제 정치의 수요자, 곧 경제계 혹은 국민이 정치의 개혁을 요구할 때이다. 물론 정치를 개혁할 "정치개혁위원회"가 구성된다면 이 위원회에는 정치권의 이득을 대변할 정치인들을 배제해야 할 것이다. 결국 지금의 경제난국을 풀 수 있는 열쇠는 경제계와 국민이 갖고 있는 셈이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2월 4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