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 한보사태와 대외신용도 .. 권수영 <고려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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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는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무역적자, 1천억달러가 넘는 외채,외환보유고의 격감과 더불어 최근 20년 이래 최대 불황국면으로 경기침체를 맞고 있다. 여기에 파업으로 인한 생산 및 판매차질이 이어지고 있는 가운데 한보그룹 부도가 겹쳐 대외신용도가 실추됨에 따라 기업은 해외에서 자금을 조달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한보철강부도로 인해 거액의 부실채권을 떠안은 관련 은행들은 물론 국내은행 전체와 기업들의 대외신용도가 떨어짐에 따라 해외 차입조건이악화되고 이에 따라 금리가 높아져 자금조달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일본금융시장은 돈이 남아도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일본내 한국계 은행의 경우 "코리언 프리미엄"을 지급해야 자금조달이 가능할 정도이다. 이러한 일본 시장의 분위기는 미국 및 유럽 금융시장에 까지 확산되어 있는 실정이다. 이와 더블어 신용도 추락에 따라, 해외차입조건 악화로 1.4분기 중 해외증권 발행을 추진하고 있던 기업들도 발생시기를 연기하는 등 해외자금조달에 차질을 빚고 있다. 또한 해외에서 거래되는 우리나라의 주요 해외증권 가격도 약세를 보이고 있다. 설상가상으로 홍콩의 시사주간지 파 이스턴 이코노빅 리뷰지에 다르면 아시아 10개국 경영자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결과 한국이 올해 아시아에서 최악의 투자전망국으로 나타났으며, 사회정치적 불안에 대한 이들의 우려도 가장 높은 것으로 조사됐다. 한보사태 이후 은행들은 신용대출을 기피하고, 회사채보증이 어려워 담보나 신용이 부족한 업체들은 극심한 자금난에 시달리고 있다. 수출부진과 수익악화가 지속되어 은행부채의 상환이 어렵고 달리 자금조달할 방안이 없는 경우 대기업조차 부도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한보사태에 따른 중소기업들의 연쇄부도가 우려되는 가운데 정부는 긴급하게 3조 6천억원 규모의 자금지원대책을 마련하였다. 그러나 중소기업지원 대책은 이미 조성하기로 예정되어 있거나 금융권에서 지원하는 자금을 모은 것이어서 자금의 대부분을 은행에 떠넘겨 놓은 상태이다. 정부는 이와 같이 자금지원을 우선적으로 마련하여 한보사태를 가시적이나마 수습하여야 할 것이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점은 대외적으로 우리나라 은행과 기업의 취약점을 적나라하게 보여줌으로써 신용도를 실추시킨 한보사태의 근본원인을 제대로 밝혀야 할 것이다. 신용평가기관에서는 한보철강의 회사채를 보증없이 발행가능한 등급으로 분류하였고, 기업어음 평정에서도 한보철강의 등급을 상향조정하여 신뢰도에 먹칠을 하였다. 또한 한보철강은 지난 93년부터 적자를 흑자로 조작하는 분식결산을 해온 것으로 밝혀져 정상적 회계 및 감사기능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정치실력자의 대출압력, 정회장의 로비청탁 그리고 은행장의 코미션 수수가 어우러져 납입자본금이 8천2백억원인 은행이 거래기업 하나에 전체여신의 4%에 해당하는 1조8백억원을 대출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결국 이번 한보사태는 금융사고가 나야 하향조정하는 수준의 신용평가제도, 만연되어 있는 분식회계, 독립성 전문성이 결여된 부실감사 뿌리깊은 정경유착, 은행의 책임경영체제의 부채, 시장원리가 결여된 금융관행에 기인 등 총체적 시스템의 문제로 볼 수 있다. 이에 따라 정부는 관련 은행장과 정관계 인사를 구속하고, 평가기관을 제재하며, 금융기관에 또다시 강제성 지원대책만 발표해 놓고 한보사태를 매듭지으려 하고 있다. 그러나 한보사태의 원인은 정치 경제적 통제제도의 실패를 유발시킨 보다 근본적인 요인에서 찾아보아야 할 것이다. 그것은 바로 원리원칙을 도외시한 사람에 따른 의사결정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즉, 의사결정이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원칙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사람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다. 이러한 인간관계에서 내려지는 의사결정은 객관적 자료와 과학적 분석에 기초한 경제성과 사업성이 아니라 혈연과 정분과 같은 비이성적이고패쇄적인 논리에 의해 지배된다. 제도적 장치에 따라 누구든 납득할 수 있게 정책이 입안되고 의사결정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조직장의 의중 또는 그를 둘러싼 주종집단의 득실에 따라 움직여진다. 이러한 은밀함이 있기 때문에 제도와 인간을 신뢰할 수 없고 부모 형제 친척 그리고 동향 동문으로 연을 맺으려 한다. 한보사태에서 드러난 정경유착, 담합, 대출외압 그리고 밀실정치와 같이 우리 사회가 지니고 있는 총체적인 문제점들도 결국은 무원칙과 무원리에 따른 사람중심의 권력과 독선에 의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나라의 대외적 신용도가 추락한 근본원인은 원리원칙이 무시되는 사회에서는 시장기능에 의한 정상적 경영판단이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그럴듯한 외형을 갖추고 있으면서 그 속을 들여다 보면 변칙적인 관행, 부정과 불의 그리고 물고 물리는 당쟁이 만연하여 비효율과 저생산성이 초래되는 것이다. 불어오는 북풍과 어려운 경제여건으로 한보사태를 서둘러 마무리한다면 뿌리는 나두고 잎파리만 짜르는 것에 불과할 것이다. 우리나라가 진정으로 대내외적인 신용도를 회복하고 국가경쟁력과 기업경쟁력을 갖추고자한다면 기본과 원칙에 충실하고 각 집단간에 신뢰할 수 있는 국정의 운영과 경영환경의 조성이 이루어지도록 한보사태의 근본원인을 치유해야 할 것이다. 이제 우리 사회는 누구나 공감하는 공정한 원칙이 수립되어 그 원칙이 제대로 집행되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줌으로써 신뢰성 회복이 시급한 것으로 보인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2월 18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