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섬우화] (45) 제1부 : 압구정동 지글러 <45>

어물쩍하면서 그들을 록색바다에 배 띄워 보낸 지영웅은 휘파람을 불면서 10시20분쯤 전에 람바다호텔의 커피숍에 들어선다. 그리고 조명이 은근한 구석자리로 가서 벽에 붙은 거울에 자기의 잘 생긴얼굴을 쓱 비쳐보고는 머리 스타일을 바꾸기 위해 화장실로 간다. 제왕의 화장실 같은 호화스런 꾸밈새의 레스트룸에 들어가자 그는 치약같이 생긴 헤어젤을 앞주머니에서 꺼내 머리에 바르고 빠르고 익숙한 솜씨로 머리를 곧추세워 빗는다. 복숭아빛 고운 피부에 말총머리인 그는 온갖 장점은 다 가진 미남이다. 옛날 포마드 같이 생긴 헤어 무스겸 젤로 나이를 열살은 더 먹어 보이게끔 이마를 환하게 치켜 빗고 귀엽게 생긴 복숭아 이마를 있는대로 드러내 모양을 낸다. 속있는 아줌마들은 어려 보이는 남자와 다니는 것을 부끄러워 하기 때문에 늘 이렇게 변장을 잘 해낸다. 푸른 수염이 돋보이는 뺨을 손으로 쓸면서 그는 애교있게 웃으며, "나 중년 신사같이 보이지요? 수염을 기를까요? 여사님과 비슷한 나이로 보이기 위해서는 이러한 헤어스타일이 좋죠? 마음에 들어요? 어때요?" 그러면 보통의 아줌마들은 그가 그런 식으로 신경을 써주는 것이 고마워서 용돈을 듬뿍 듬뿍 주며 빚을 내서라도 바친다. 그는 돈을 많이 하사받기 위해서라면 자기가 할 수 있는 모든 재주를 다 동원한다. 그러니까 아줌마들은 그에게 꼬박 속아넘어간다. 얼마나 나를 대단하게 사랑하면 저 어린 것이 저토록 신경을 쓸까? 언제 나의 남편이라는 사람이 나를 위해서 그토록 신경을 써준 일이 있는가? 그녀들의 사랑의 광기는 그에게 자기의 모든 주머니를 탁탁 털어서 바쳐도 아깝지 않게끔 헌신을 다하게 하는데 있다. 사실 아름답고 신선하게 생긴 그를 위해서 얼마나 많은 아줌마들이 빚을 졌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녀의 주머니가 삐거덕거리기 시작하면 얼른 그는 삐삐 번호를 바꾸고 새로운 봉을 잡으러 날아가 버린다. 그리고 같이 가던 곳에는 얼씬도 안 하고 몸을 도사린다. 만약 어디서 딱 맞닥뜨리면 몸이 아프다고 살살 꼬리를 빼면서 아주 못되게 굴기도 한다. 고향에 갔다 왔다고 서글퍼하면서,입원해야 되겠는데 돈을 좀 달라고 그러면 아줌마들은 갑자기 걸음아 나 살려라 하고 도망친다. 돈으로 맺은 관계들은 그렇게 돈에 의해서 와해되고 상처를 남긴다. 기쁨조 철학중의 제1조는 "주머니 빈 여자는 상대 말것"이다. 그는 있는 정성을 다 해서 젤로 머리를 세우고 분을 바르고 로션으로 손을 곱게 문지른 후 역시 주머니에 늘 넣고 다니는 휴대용 콜롱까지 쏴 뿜는다. 그는 늘 옷의 칼라와 옷소매에 콜롱을 뿌리는데 그래서 그는 말할때마다 몸에서 향기가 싸하니 난다. 거울을 보고 곱게 눈을 흘기면서 이야기하는 연습을 살짝 한다. 호텔의 아늑한 레스트룸을 분장실겸 표정연구의 연습실로 쓰는 데에 그는 단단히 이골이 났다. 그리고 오늘 공박사로부터 사타구니에 손을 가져가지 말라고 혼이 난 것을 되새기면서 공박사처럼 수준 높은 김영신 사장님에게 곱게 보일 수있는 연기연습에 열중한다. 그는 슬쩍 고급의 파텍 시계를 들어 시간을 본다. 아 그리운 나의 망명한 여사님, 파텍 시계는 그녀의 생일 선물이었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2월 24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