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섬우화] (56) 제1부 : 압구정동 지글러 <56>

"금요일을 할애할 마음이 없다면 나도 다른 데서 금요일의 파트너를 찾지요" "그런 뜻이 아니구요. 내가 지코치의 집 연락처를 알면 안될까요?" 그녀는 어디까지나 상냥하다. 그녀의 지금 가장 큰 관심사는 다음에 만나면 눈에 번쩍 띄는 용돈을 주며 놀고 싶다. 또 그녀는 지금 일주일후의 자기의 사정을 점치기가 힘든 코너에 몰려 있기도 하다. 그녀의 자신만만하지 못한 낌새를 예민한 지영웅이 무엇인가는 몰라도 화살이 흘러가듯 예민하게 번개같은 찰나에 캐치해버린다. "핸드폰 넘버를 가르쳐 줄 수 있어요? 나는 사업하는 사람이라서 그때 홍콩에 가 있을 수도 있고. 미안해요, 언짢게 받아들이지는 말고요" 김영신은 그의 푸른 수염자국을 바른손으로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흠뻑 그의 젊은 향기에 매료된다. 순간 김영신은 그 푸른 수염자국의 까실한 감촉에서 온 몸에 찌르르 감전되는 강한 성적 매력에 정신이 아찔해온다. 남편은 수염이라고는 한 올도 안 나는,그래서 더욱 얌체스러운 짓을 밥먹듯하는 성품에 있는대로 환멸을 느끼고 있었다. 이때 지영웅이 그녀의 손을 당겨 불같이 뜨거운 입맞춤을 손등에 퍼붓는다. 너무나 세련된 달콤한 키스라 데일 듯이 뜨겁다. 김영신은 온 몸에 파도를 일으키며 퍼져오는 강한 성적 충동을 눌러 참으며 휘청한다. "다음 금요일에 꼭 시간을 낼게요. 그러나 내가 지코치를 만나고 대화를 하고 싶을때 할 수 있게 전화번호를 주었으면 더욱 편리하겠어요" 그 순간 지영웅은 그녀를 와락 껴안으며 뜨거운 숨을 내쉬면서 어리광을 섞어서 말한다. "사랑해요, 누님. 누님 같은 여자와 매일아침 같이 커피를 마시고 싶어요. 태양이 뜨는 아침 창가에서 슈베르트를 들으면서" 어느 날인가. 제주에 같이 갔던 피아니스트 아줌마가 자기에게 속삭였던 세리프를 그는 지금 유효적절하게 효과적으로 쓰고 있는 것이다. "아아, 시인같은 나의 왕자님. 나는 지코치가 그렇게 정서적이고 낭만적인 사람인 줄은 몰랐어요. 꼭 금요일 밤, 우리 황홀한 시간을 가져요" 그녀는 진정 의외라는 듯이 그의 슬프게 생긴 큰 눈을 들여다보며 속삭인다. 지영웅은 포켓 깊은 곳에서 명함을 한장 꺼낸다. 미리 준비해왔던 것이다. 그 명함에는 지영웅이라는 이름과 인도어 골프장의 이름과 핸드폰의 넘버가 적혀 있다. 단순한 디자인의 푸른빛 종이가 발칵거린다. 언젠가 사귀었던 인쇄회사 아줌마가 만들어준 명함이었다. 정성을 다 해서 최고의 솜씨로 만든 명함이었다. "명함도 너무 멋져요. 이렇게 멋있는 디자인의 명함 처음 봐요" 그녀는 지금 젊고 아름다운 남자가 사랑한다는 말을 했기 때문에 그 말에 아예 뿅 가서 가슴이 후들후들 떨리고 있었다. 나를 사랑한다고? 언젠가 아주 오랜전에 들어본 세리프다. 젊은 남자의 끓는 육체만도 황홀한데 사랑까지 고백하다니, 정말 너무나 의외의 수확이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3월 8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