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기업인] '전자부품업체 사장'..완제품 성패의 지렛대
입력
수정
삼성전기 직원들은 사장실 문이 활짝 열려 있으면 행동이 조심스러워진다. 이형도 사장이 "근무중"이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회사에선 사장실 문이 열려 있으면 "부재중"인 반면 닫혔을 경우 "재중"이다. 삼성전기는 정반대다. "사장실은 누구든 들어오고 싶은 사람이 언제든 들어올 수 있어야 한다"는 게 이사장의 지론이기 때문.여기에는 또 "관리보다는 현장이 우선"이라는 전자부품업계 특유의 기업문화가 숨어있다. 전자부품산업은 하루에도 수십가지 신제품이 쏟아져 나온다. 개발되는 품목은 수만가지이지만 이중 정작 사업화돼서 양산에 들어갈 수 있는 제품은 극소수다. 그래서 부품산업의 경쟁력을 말할땐 품질 가격과 함께 타이밍을 꼽는다. 품질과 가격은 대부분의 산업에서 공통적인 경쟁력 요인. 그러나 타이밍은 부품업계만의 독특한 요소다. 말그대로 "필요한 부품을 정확한 시기에 생산할 수 있는" 능력이다. 이같은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선 "전략"이 필요하다. 반면 품질과 가격 경쟁력은 "현장"에서 나온다. 그런점에서 부품업계 경영진들은 "현장"과 "전략"이라는 서로 상반된 요소를 체화시킨 전천후 경영인인 셈이다. 그래서일까. 부품업체 사장들은 유난히 지방출장이 잦다. 엄길용 오리온전기 사장은 보통 일주일에 2~3일은 공장에서 산다. 공장내에 집무실이 따로 있을 정도다. 삼성전기의 경우 서울엔 사무실만 있을 뿐이다. 이형도 사장은 나흘은 수원공장, 나머지 이틀은 부산공장에서 지낸다. 조희재 LG전자부품사장이나 왕중일 대우전자부품대표도 마찬가지다. 부품업계 경영인에게 요구되는 자질을 또하나 꼽는다면 기술에 대한 감각이다. 개발된 기술을 어떻게 상품화할 수 있는지, 또 완제품에 적용했을때는 어떤 문제가 있는지에 대한 직관력이다. 이는 단순히 기술자라야 한다는 의미와 다르다. 사장 자신이 엔지니어일 필요는 없지만 "기술과 경영"을 접목시킬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즉 CTO(최고기술경영자)로서의 자질을 요구받고 있다는 것이다. 전자부품업계 최고경영진중에 유난히 이공계 출신이 많다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은 듯하다. 부품업체의 주고객이 세트메이커인 만큼 이들과 좋은 유대관계를 유지해야 하는 것도 최고경영진의 몫이다. 또 세계 전자산업의 흐름을 제대로 파악해 이를 부품개발이나 생산성 향상과 연계시켜야 함은 물론이다. 품질은 모든 부품업계 경영진들이 가장 중시하는 대목. 최고경영자가 직접 품질평가회의를 주재하는 것만 봐도 그렇다. 품질회의는 생산 영업 개발 등 담당 부서장과 관련 임원 모두가 참석해 긴장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된다. 부품업계에선 "품질이 곧 영업"이라는 얘기가 있다. 품질만 좋으면 영업은 저절로 된다는 부품산업의 특징을 집약시킨 말이다. 국내 전자부품업계는 세트메이커와 철저한 수직계열화를 이루고 있는 게 특징이다. 사실 이같은 수직계열화체제는 국내 전자산업이 조기에 경쟁력을 확보하는 밑거름이 됐다. 삼성전관 전기 코닝은 삼성전자와, LG전자부품은 LG전자와, 대우전자부품 오리온전기는 대우전자와 각각 한지붕을 이루고 있다. 완제품의 경쟁력이 곧 부품의 경쟁력으로 이어지는 구조다. 국내 대형 부품업체들이 세트메이커의 단순한 하청업체로 전락하지 않고 나름의 경쟁력을 갖춘 대형업체로 성장할 수 있었던 비결도 여기에 있다. 삼성전자의 "명품 플러스 원"이 탄생한 과정을 보면 보다 이해하기가 쉽다. "잃어버린 1인치를 찾았다"는 광고 카피가 말해주듯 명품플러스원은 브라운관의 가로 세로 비율이 12.8대9다. 이같은 TV를 만들기 위해선 기존 브라운관(4대3비율)으론 불가능하다. 우선 브라운관용 유리벌브부터 이 규격으로 제작돼야한다. 신규격 브라운관에 맞는 고압변성기와 튜너 등이 있어야 함은 물론이다. 소니 필립스 등 내로라하는 TV제조업체들이 신규격 TV개발에 엄두조차 내지 못했던 이유도 수직계열화된 부품업체들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어느덧 세계 5대 전자대국의 하나로 발돋움한 국내 전자업계 발전의 뒤안에는 이렇듯 묵묵히 완제품의 경쟁력을 받쳐주는 전자부품업계가 있었음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3월 10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