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섬우화] (87) 제2부 : 썩어가는 꽃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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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인은 자기의 삐삐가 울려오자 얼른 허리에 차고 있던 사각형의 작은 악마를 꺼내본다. 어머니가 부른다. "전 지금 돌아가야 돼요. 어머니가 찾아요. 미안합니다. 번호를 못 가르쳐드려서... 미안해요" 그녀의 태도가 너무 겸손하고 곱다. 또라이같던 인상은 싹 지워지고 그녀는 다시 아름다운 숙녀가 된다. "저, 미국에 가면 언제 오시지요" 웨이터는 자기의 판단이 틀렸음을 느끼면서 사장님에게 충성을 다 바쳐야 하는 신분으로 돌아간다. "아가씨는 아주 풋내기인것 같은데요. 남자들이 원할때 그렇게 빨리 응하면 김빠져 하거든요. 특히 우리 사장님은요, 승부근성이 강해서 안 되면 될때까지 해보는 싸나이중에 싸나이입니다. 아가씨가 마음에 들어서 가르쳐 드리는 것인데요. 그만한 인물이면 좀 더 버텨봐요. 아가씨는 정말 환상적으로 생겼어요. 우리 사장님은요, 돈을 안 아껴요. 마음에만 들면요, 결혼도 할 수 있어요. 사모님이 돌아가셨거든요" "결혼같은거 안 해요" "늙은이가 더 좋다고 했잖아요" "그건 저어. 나좀 봐, 내가 왜 이러고 여기 있지" 그녀는 자기가 왜 여기 있는지조차 지금 자각하지 못한다. 기억의 끈이 끊어진 것이다. 그녀는 육체적으로 시달리고나면 기억의 끈이 끊어지곤 했다. 여고때의 코리안 우등생 제인킴은 이미 어디로인가 사라지고 마약중독의 금단현상에 시들어 썩고 있는 박미자가 남아 있는 것이다. 그녀는 상냥하고 부드럽게 웃는다. "그만 가볼게요. 저에게 관심 가져주셔서 고맙다고 전해주세요" 아뿔싸, 이렇게 교양있고 마음씨가 비단결같은 여자라면 자기의 오야붕도 홀딱 반할 것이다. 정말 드물게 교양있고 수선화같이 고운 아가씨다. 웨이터는 자기의 신분을 잊고 그녀에게 반한다. 모든 다른 남자들처럼 그녀석도 제인의 너무도 겸손하고 고운 언어행동과 미소 띤 얼굴에 정신이 없어진다. 이번에는 사장이 아니라 자기가 그녀의 삐삐번호를 알고 싶다. 지금 가면 영원히 그녀를 못 만날지도 모른다. "아가씨, 정말 번호 안 주고 가실래요. 내가 혼나요. 나는 사장님의 월급을 받는 몸이니까. 제발 저의 부탁을 들어주시라구요" 바짝 몸이 단 것은 이제 이 총각이다. 고생해서 번 돈이 통장에 8백50만원이나 있다. 그는 목에 힘을 주면서 제인에게 바짝 다가선다. 멍청해진 채 제인은 중얼거린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4월 15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