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섬우화] (93) 제2부 : 썩어가는 꽃 <28>

힐러리를 닮은 낯선 교포 아가씨는 햄버거를 순식간에 다 먹어치운다. 그야말로 맛을 음미하는 것이 아니라 굶주린 위를 채우려는 것 같은 발작적인 식욕이며 본능적인 요기인 것 같다. 따뜻한 보리차를 따라주면서 박동배는 호시탐탐 그녀의 회복을 지켜본다. 햄버거 한개를 눈깜박 할 사이에 다 해치운 제인은 눈을 스르르 감더니 그냥 깊은 잠에 취한다. 박동배 사장은 그녀의 조그마한 핸드백을 슬그머니 뒤진다. 현금이 85만원이나 있다. 10만원권 수표로 되어 있어서 얼른 세어보고 나서 소지품을 뒤진다. 샤넬 콤팩트가 한개, 검은 빛깔이 도는 립스틱이 한개. 박동배의 눈에는 언제나 립스틱의 요새 유행색이 못마땅하다. 도대체가 왜 여자들은 붉고 건강한 핑크색을 안 바르고 썩은 것 같은 자주빛이나 검은 색깔이 도는 무시무시한 색을 바를까? 또 무엇이 있을까? 그는 옛날 자기가 호텔보이로 일하기 전에 만수형님에게 붙어서 꿀꿀이죽이라도 얻어먹어가며 소매치기 하는 법을 배웠던 솜씨로 재빠르게 그녀의 핸드백을 발랑 까서 뒤집어 본다. 신분을 알게 하는 아무 것도 없다. 몇시간이 지났을까? 새벽 3시가 가까웠을 때 그녀의 허리에 찬 삐삐가 울렸다. 그녀의 옆 소파에서 느긋하니 새우잠을 자고 있던 박동배는 그녀의 삐삐를 떼어내서 걸려온 전화번호를 급하게 암기한다. "이봐요, 아가씨. 신호가 왔어요. 어머니가 아닐까?" 겨우겨우 정신을 차린 제인은 벌떡 일어나 앉으며 그에게 머리를 깊이 숙여서 인사를 한다. "아니오. 아가씨, 정신 좀 차려요. 여기는 세븐스타 호텔이고 나는 이 호텔의 오너 사장이오. 여기는 내 응접실이고" "아아아..." 그녀는 그때서야 기억이 돌아와서 부끄러워하며 그에게 고개를 숙여 다시 인사를 하며 몸을 일으키려다가 박사장이 도로 누이는 바람에 그 자리에 도로 누워버린다. 사실 일어설 힘이 없다. 정신적인 무기력만이 아니고 김빠진 풍선처럼 몸의 균형까지 잃은 불안한 상태다. 마약이 그녀의 소뇌를 다쳐서 그녀는 가끔 균형을 잃는 적이 많았다. 그래서 쓰러지고 엎어지는 것이다. 누워있기도 힘이 들다. 이때 박사장은 그녀가 정신이 들고 잠을 깬 것이 무척 반갑다. 그것은 그녀의 잠든 얼굴이 너무 신비하게 아름다워서 욕심이 서서히 동해서였다. 박동해는 용문산에서 며칠전에 고아먹은 백사의 기로 불끈 치솟은 보물대감을 달래면서 그녀를 향해 침을 흘린다. "이봐 아가씨. 아가씨는 정말 백합의 향기를 지닌 미인이야. 하느님도 고마우시지, 나에게 향기로운 꽃을 주시고" (한국경제신문 1997년 4월 22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