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 에세이] 5월...어린이 교육 .. 정유성 <서강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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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성 일년 12달 그 많은 달 가운데 가장 빛나는, 흔히들 계절의 여왕이라고 칭송하는 5월이다. 굳이 "이 아름다운 5월에."하는 그 유명한 하인리히 하이네의 멋진 싯귀가 아니더라도 푸르른 싱그러움은 누구라도 기리지 않을 수 없을만큼 빼어나다. 나 또한 그나마 햇빛이 잠시 비껴만가는 연구실 창밖으로 반짝이는 5월의 뽐내는 모습을 마음 설레며 물끄러미 바라보게 된다. 그러나 문득 5월이 교육의 달이라는데 생각이 미쳤다. 아버지날, 어린이날, 어버이날, 스승의 날 같은 가족과 교육에 관련된 기념일이 줄지어 있다. 무엇보다도 자라나는 새싹들을 기리는 어린이날은 5월의 계절 분위기에 그렇게 잘 어울릴 수가 없다. 이제 막 초등학교에 입학한 우리집 아이만봐도 그 티없고 맑은 모습이 5월 그대로이니 말이다. 그런데 5월에 취하고 새싹들의 싱그러움에 흥겹다가도 우리 교육을 생각하면 왜 이렇게 마음이 어두워지는걸까? 이토록 아름다운 계절도 아랑곳없이 왜 우리 교육은 이리도 흉한 꼴일까? 여러가지로 어지럽고 헝클어진 오늘날 우리 살고 있는 세상에 그나마 자라나는 새싹들이라도 잘 길러 좋은 세상 만들자는 것은 우리 모두의 바램이려니와 정작 그 교육은 왜 이렇게 엉망일까? 요즘들어 부쩍 나 스스로 교육 공부하고 가르치는 사람 노릇이 참으로 어렵다는 한탄이 잦다. 왜냐하면 세상이 어지로울수록 사람들은 미래를 기약하고 바로 그런 미래를 가꾸는 일인 교육에 기대를 걸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여기 우리 사는 사회처럼 온통 "바담풍"하는 사회에서 교육이라고 제대로 될리가 없다. 오히려 그런 사회의 어지러움이 교육을 엉망으로 만들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또 그러길래 가장 먼저 바꾸고 고치고 해서 교육을 바로잡고 세상을 사람답게 만들어야 한다. 이런 딜렘마 상황이 요즘처럼 버거울 때가 없다. 어디서부터 손대야 할지 무엇부터 해야할지 허둥거리게만 된다. 그저 한두군데 고치고 바꾼다고 해서 될일도 아니며 말그래도 뿌리를 갈고 체질을 바꾸는 환골탈태만이 교육을 살릴수있을 것같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더욱 힘겨울 때가 많다. 그러다간 그만 나 혼자 무얼 어쩔 수 있으랴 게으른 변명부터 찾곤 한다. 하지만 이 아름다운 계절에 싱그러운 새싹들을 보자니 이냥 주저물러 앉을 수는 없지 하고 마음을 거듭 다져먹게 된다. 그러면서 또 한번 걱정만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우리 교육을 교육답게 해볼 것인가 궁리한다. 그렇다고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이 자연의 조화와도 같은 상식적인 궁리일 뿐이지만 그 궁리는 이렇다. 본디 사람 모여사는 일,사람 만드는 일인 교육에 썩 뾰족한 수가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진정 아름다운, 교육다운 교육이 무엇인지 처음부터 되짚어 보는 일이 중요하다. 우리가 교육이란 이름으로 자라나는 새싹들에게 지운 무거운 짐은 어떤 것인지, 말그대로 이 아름다운 계절에 걸맞은 나무심기와도 같은 적당한보살핌과 가꿈인지, 아니면 환경도 파괴하고 나무도 엉터리로 웃자라게만 하는 화학비료와 약품을 마구 쓰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반성이 그것이다. 또 무엇보다도 어버이와 어른 노릇을 우리가 제대로 하고 있는지 되돌아 보자는 것이다.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어버이와 어른이 저지른 가장 비교육적인 관행과 버릇들을 뉘우치자는 것이다. 모두들 어린이날 선물준비에 한창이다. 그런데 이번엔 놀이동산이나 백화점, 선물 보따리가 아니라 어른들,어버이들의 뉘우치는 눈물, 그리고 새로운 마음가짐, 존재의 매무새를 바로잡는 일로 선물삼으면 어떨까? 이것은 나 스스로에게 하는 다짐이기도 하다. 그동안 교육걱정, 교육 바로 세우기에 나선다고 어줍잖게 뛰어다니느라 소홀히 한 우리 아이에게도 나는 내 반성과 참회 그리고 새로운 마음가짐을 선물하련다. 고개 숙인 아버지가 아니라 마음 돌린 아버지, 열린 아버지로. (한국경제신문 1997년 5월 3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