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급진단 '고실업시대'] (5) '인력시장도 찬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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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위가 어슴프레 밝아오는 새벽 5시30분. 서울 남대문시장 옆 지하철 회현역 주변 인도에는 20여명의 남자가 공구가방을 둘러메고 서성이고 있었다. 하루동안 일을 시키고 품삯을 주겠다는 업자를 만나기 위해서다. 이들이 기다리는 동안 봉고차 한 대가 와서 3명의 근로자를 싣고 사라졌다. 이 봉고차가 떠난 뒤에는 아무도 이들을 찾아오지 않았다. 주위가 훤해지자 이들은 자리를 털고 일어나 고개를 떨군채 뿔뿔이 흩어졌다. 10년째 이곳에 나온다는 정모씨(38.종로구 창신동)는 "요즘에는 기껏해야 서너명 정도 뽑혀 간다"면서 "경제가 왜 이 모양이냐"고 되물었다. 이 무렵 인근 북창동 골목에는 중국음식점에서 일하려는 이들이 3백여명이나 몰려 있었다. 주방장 자리를 구한다는 김모씨(35.관악구 신림동)는 "나오는 일자리가 1년전에 비하면 10%에 불과하다"면서 "이렇게 많은 사람이 몰려 있지만 기껏해야 하루에 열명 가량만 일자리를 덩는다"고 말했다. 불황의 그늘이 중국음식점까지 드리우고 있었다. 김씨는 "중국음식점들이 장사가 안되니까 종업원을 절반수준으로 줄이고 있다"고 말했다. 서울 중구 만리동고개에도 날마다 실업자들이 모이는 공간이 하나 있다. 서울지방노동청이 운영하는 일일직업안내소가 바로 그곳이다. 이곳에도 새벽4-5시만 되면 일자리를 구하려는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그러나 사람을 쓸 곳이 많지 않아 대부분 그냥 돌아가기는 다른 인력시장과마찬가지다. 직업안내소 관계자는 "일감이 급격히 줄어드는 바람에 지방 공사장에서라도인력 요청이 들어오면 서로 가겠다고 아우성이다"고 말했다. 이날은 운 좋게도 일감을 구하러 나온 70여명중 20여명이 수해복구현장에서 장기간 일하게 됐다며 강원도 철원군 동송읍으로 봉고차를 타고 떠났다. 서울지하철 2호선 서울대입구역 인근에 있는 서울인력은행은 취업시즌이 아닌 요즘에도 하루 70여명의 구직자들이 찾아오고 있다. 특히 점심시간 직후에는 구직자들이 한꺼번에 몰려들어 북새통을 이룬다. 용산 미군부대에서 시설관리직으로 일하다가 최근 정리해고당했다는 허모씨(41.전문대졸). 자식들이 한창 커가는 나이에 일터를 잃어 도무지 살맛이 나지 않는다고한탄했다. 그는 "그동안 모아놓은 약간의 자금으로 사업을 해보려 생각도 했지만 워낙 경기가 좋지 않아 실패할까 두려워 안정적인 직장을 얻기 위해 이곳을찾아 왔다"고 말했다. 서울 S여대 불어과를 졸업한 오모씨(27)는 스튜어디스가 되고 싶어 몇년째시험을 치렀으나 번번히 낙방했다. 이제는 나이제한에 걸려 다른 길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는 실정이어서 인력은행을 찾아 왔다고 했다. 대기업 기획조정실장으로 일하다 지난해 실직한 이모씨는 "실직후 개인사업을 시도했지만 1억여원의 사업자금만 날렸다"면서 "중소기업에라도들어가 열심히 일하고 싶어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이곳을 찾아왔다"고 말했다. 이곳에서 취업상담을 하는 상담원 오성욱씨는 "실직당한뒤 혼자 거리를 배회하다가 이곳을 찾아온 구직자들은 대부분 사회에서 버림받았다고 생각하고 있다"면서 "40,50대 남자들이 입구에서 머뭇거리다 아무 말도 못하고 돌아서는 모습을 볼 때는 가슴이 아프다"고 말했다. 일터를 잃어버린 실직자들이나 날품을 팔아 하루하루를 꾸리는 이들에겐 신록이 짙어가는 5월도 눈보라치는 겨울과 다를바 없다. 인력시장이나 인력은행을 찾는 실직자들의 축 늘어진 어깨에는 여름의 문턱인데도 찬바람이 느껴진다. 그래서인지 이곳에서 만난 실업자들은 한결같이 웃음을 잃은 표정이었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5월 7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