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파일] (신세대 문화 엿보기) '노예의 땅' "신촌"

신촌의 밤은 인간이 창조한다. 저녁 6시30분. 이곳엔 때이른 "밤의 전령"들이 하나 둘씩 등장한다. 귀고리에 일명 "똥싼 바지"를 질질 끄는 10대들. "삐끼"라 불리는 이 호객군들은 삼삼오오 나타난지 두시간도 채 안돼 신촌전 지역을 접수한다. 이제 거리를 지나는 누구도 이들의 간섭에서 자유로울 권리는 없다. 9시가 넘어서자 신촌은 완전히 삐끼에게 점령당한 "노예의 땅"이 되어버린듯하다. 한때 "로고스(이성)의 고향"으로 불리던 신촌. "오늘의 책"에서 남은 약속시간 동안 신간도서를 뒤적일 수 있어 좋았던 거리. 거리에는 잔잔한 음악이 흘러나와 낭만을 얘기할 수 있었던 곳. "복지탁구장"에서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 몸을 풀 수 있었던 곳. 행인의 눈을 피해 슬그머니 여자친구의 손을 잡으며 짜릿한 전율에 몸을 떨던 풋내기 연인들의 거리. 그 신촌이 이제 "물갈이"를 끝냈다. 책과 낭만 이성은 이제 그야말로 흘러간 "클래식(Classic)"이 되어 버렸다. "오늘의 책"은 올해초 일본식 패스트푸드점 "요시노야"에 자리를 내주고 골목으로 밀려났다. 작지만 지성들의 푸근한 휴식터였던 "올서점"도 자본의 논리에 밀려 문을 닫은지 오래다. 신세대들은 이제 하나 남은 "홍익서점"앞에서 번잡하게 만나기보다는 "신촌지엔느"의 고향 그레이스백화점앞을 선호한다. 서점앞에 붙은 약속메모장을 뒤적이던 낭만파들도 이제는 헨드폰과 삐삐 시티폰등 첨단 정보기기로 무장한 신세대들 사이에서 모습을 찾을 수 없게 됐다. 복지탁구장이 있던 자리엔 "고모라의 밤"만이 남았다. 셀수도 없이 늘어난 전화방 단란주점 록카페 소주방등이 대신 둥지를 틀었다. 올들어서만 신촌근방에 새로 생긴 전화방은 10여개. 이곳에선 밤마다 "음란의 축제"가 벌어진다. "관계를 유지하는 남자친구가 2명 있는데 하나 더 갖고 싶다"는 20대초반 여성과 시간당 만원에 성의 유희를 탐닉하려는 30대 직장인이 수화기너머로말초신경을 더듬는다. "물"을 관리하기 위해 여자손님을 회원제로 운영한다는 지하록카페에서는 "양질"로 판명된 젊은 남녀들이 익명의 파티에 몰입한다. 수도 없이 널린 소주방에서는 덧없는 쾌락에 몸을 던진 10대 여중생 "삐끼"와 30대 직장인이 서로 엉긴다. 촌뜨기 대학생 연인들도 길거리에서 사라졌다. "나는 나"란 말을 신주단지처럼 받드는 신세대들은 이제 거리에서도 당당히 키스한다. 이 "러버"들의 취향에 맞게 거리의 음악도 바뀌었다. 잔잔한 클래식 대신 불법을 파는 음반시장의 이단아 "길보드상"들이 튼 최신팝송과 가요가 거리를 장악한다. 신촌의 밤거리를 즐기려는 이들은 무의식중에 이들에게 의식의 한 부분을 점령당한다. 이들에겐 길보드 DJ가 트는 음악을 거부할 면역성이 없다. 이들이 리드하는 소비와 향락으로 점철된 신촌의밤은 무르 익어만 간다. 막걸리를 마시며 목이 터져라 노래부르던 "청실홍실"과 "보은집" "육교집"도 사라진 신촌의 대표적인 명물. 이들이 버티고 있던 자리엔 이제 재즈카페 멀티카페등이 줄을 잇는다. 30만원을 호가하는 조니워커 블루, 20만원대 로열 살루트등을 비롯 미켈롭하이네켄등 물건너온 술만 판다는 재즈바에서는 포켓볼을 여유있게 즐기는국적불명의 젊은이들이 재즈에 몸을 흔든다. 이런 신촌을 옛날로 복구하자는 시민들의 목소리는 다소 버거워 보인다. 이 일대 상인과 대학생이 주축이 돼 6년째 계속해온 "신촌문화축제"는 그 취지에도 불구하고 또 다른 상업문화일뿐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 문화축제자체가 이미 소비를 부추기는 자본의 논리를 대변하고 있다는 목소리다. 올해는 "신촌문화축제"와 나란히 "반신촌문화축제"도 치러졌다. "잃어버린 대학생들과 시민들의 공간, 신촌을 되찾자"라는 취지로 이화여대가 주관한 이 행사를 통해 학생들은 서명운동과 야외영화제등으로 시민들의의식개혁을 부르짖었다. 이런 기대에 부응하는 새로운 가능성도 엿보인다. "웹스페이스" "인터게이트" "웹"등 인터넷 카페들이 그것. 차와 간단한 맥주를 마실 수 있는 이곳은 인터넷을 통해 전세계 정보와 미래를 탐닉하려는 젊은이들에게 새로운 메카로 떠오르고 있다. 이광석(나우누리 인터넷스터디포럼(ISF)시숍)씨는 "근세 유럽에서 담론의 장이었던 "살롱"을 대신할 전세계 젊은이들의 마당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5월 20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