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노사문화 정착] (2) '쟁의만능' 사라진다' .. 유연 대처

경북 구미시에 위치한 한국합섬.지난해 4월 전투경찰 9개 중대가 회사를 둘러싸는 살벌한 풍경이 연출됐던 곳이다. 불법파업과 공권력 투입이라는"전근대적 쟁의공식"이 그대로 나타났었다. 한달하고도 일주일이나 끌었던 파업으로 회사의 매출은 바닥으로 떨어졌다. 노조간부에 대한 징계와 손해배상청구도 뒤따랐다. 양측은 상처투성이로 남았다. 그로부터 1년여가 지난 오늘.이 회사 노조는 지금 칠곡군 제2공장에 지부를 설치하는 준비로 바쁘다. 노조전임자도 작년 보다 한 명이 더 늘어났다. 조합원들은 지난해 파업으로 보류됐던 것까지 포함해 두 호봉이 한꺼번에 올랐다. 노조는 올해 임금과 단체협상을 회사측에 위임했다. 노사화합에 힘입은 신바람이 회사전체에 일고 있는 것이다. 비단 한국합섬만이 아니다. 쌍용자동차와 기아자동차 등 대형사업장도 올해 임단협 투쟁을 없애기로 했다. 특히 대표적인 강성노조였던 이들 노조가 회사측에 올해 협상을 일임하고 대신 생산성향상운동에 적극 나서기로 한 것은 사건임에 분명하다. 이같은 노사의 새로운 모습이 의미하는 바는 크다. 바로 쟁의만능주의가 종말을 고했음을 뜻한다. 이상억 한일합섬노조 총무부장의 "작년 파업으로 얻은 게 별로 없다"는 말은 이같은 흐름을 대변한다. 바로 쟁의만이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는 생각이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그 자리에 회사가 있어야 노조도 있다는 인식이 스며들고 있다는 얘기다. 지난달 26일 파업에 들어갔던 만도기계 문막공장에서도 노조의 변화된 모습은 나타났다. 파업이 이틀째에 들어가자 반장 4백여명이 파업불참을 선언했다. 파업을 하고 있는 일부 조합원들은 자신들을 대신해 생산라인에 들어간 관리직 사원들에게 작업공정을 자세히 가르쳐주기도 했다. 공장을 점거한 생산직 사원들과 이를 해산시키려는 관리직 사원간의 소모적 싸움은 더이상 찾아볼 수 없었다. 파업의 양태도 달라졌다. 올들어 한달이상 파업을 한 곳은 유진운수 한국호세코등 2개 사업장뿐이다. 파업기간이 그만큼 짧아졌다. 게다가 파업을 하더라도 끝장을 보자는 식의 막무가내적인 모습도 없어졌다. "최근 파업을 벌이는 노조들은 대부분 생산시설을 점거하지 않고 관리직의 제품출하를 방해하지 않는 등 과거와는 분명히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다"(홍사윤 부천지방노동사무소 근로감독관). 물론 이같은 흐름을 쟁의문화의 변화라고 단정하기는 섣부른 감이 있다. 창원에 있는 T사의 사무국장은 "경제가 어려운 만큼 힘으로 밀어부치는 파업은 노동운동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만 높일 가능성이 있어 노조가 다소 유연하게 대처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노동전문가들은 쟁의만능주의가 급속하게 사라지고 있다고 지적한다. 특히 복수노조허용등으로 그동안 국내 노동운동을 탄압한다는 지적을 받아온 소위 독소조항들이 상당히 개선되면서 이에 맞도록 노동운동도 변화해야 한다는 인식이 퍼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창원지방노동사무소 신삼랑소장은 "노동법이 바뀐 뒤 옛날식으로 해서는 여론의 지지를 받을 수 없다는 것을 노동계도 깊이 생각하고 있다"면서 "노동계와 경영계가 모두 지금처럼 힘과 힘의 대결양식을 지양해 나갈 경우 쟁의만능주의는 조만간 완전히 뿌리뽑힐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7월 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