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남아 '통화위기'] (3) '수출전선에도 먹구름'

동남아 통화위기가 한국기업의 수출전선에도 먹구름을 드리우기 시작했다. 이미 맺은 수출계약이 파기되는가 하면 가격을 낮춰달라는 수입업자들이 줄을 잇고 있다. 은행도 신용장(L/C)개설 요건을 강화하거나 신규 L/C취급을 중단하는 등 빗장을 걸기 시작했다. 수입을 해도 채산성을 맞출 수 없는 통화가치 폭락이 수입수요를 꽁꽁 얼려놓고 있다. 중소무역업자인 차필기 원준산업 사장은 바트화 폭락의 위기를 온몸으로 느끼고 있다. 방콕 스쿰비트거리에 있는 한국음식점 "서울집"에서 만난 그는 "큰일났다"며 한숨부터 쉬었다. 바트화가 핫머니의 2차공격을 이겨내고 안정세를 유지하던 지난 5월말 맺은 게맛살 제조기계 수출게약에 급브레이크가 걸렸기 때문이다. 그가 털어놓는 사정은 이렇다. "바트화값이 20%가량 떨어지자 수입업자가 계약이행을 못하겠다고 버티고 있다. 당초 계약대로라면 앉아서 손해볼 수밖에 없다는 이유에서다. 상대방 처지를 이해할 수는 있으나 계약이 이행되지 않으면 이미 만들어 놓은 기계는 고철이 돼 버린다. 울며 겨자먹기 식으로 가격을 어느정도 조정할 방법밖에 없다" 차사장이 중소무역업자(오퍼상)라고 해서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은 아니다. 대형 수출업체와 종합상사도 비슷한 처지에 놓여있다. 주영웅 한화종합화학 태국현지법인 사장은 "L/C개설이 크게 어려워졌다"고 은행쪽 분위기를 전했다. L/C개설때 내는 마진(수입보증금)이 수출대금의 10%에서 100%로 높아졌다. 경우에 따라선 별도 담보를 요구하기도 한다. "이미 20%나 폭락한 바트화가 어떻게 움직일지 불투명하기 때문에 은행이 손실을 최소화하려고 L/C 관련 업무를 꺼리고 있다"는게 주사장의 분석이다. 이같은 수출환경악화는 태국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바트화 폭락의 영향권에 있는 필리핀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등 ASEAN(동남아시아국가연합)국가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유덕희 외화은행 방콕지점장은 "자국통화가치가 크게 흔들리고 있는 이들 국가도 수입억제에 나서고 있다. 특히 유혈사태까지 일어날 정도로 정정이 불안한 인도네시아는 더욱 사태악화가 우려된다"고 말했다. 한국의 태국에 대한 수출액은 지난해 26억달러에 달했다. 통화위기를 겪고 있는 4개국을 합하면 1백20억달러에 이른다. 전체수출의 9.2%에 달하는 적지않은 규모다. 수출의 절대규모보다도 떠오르는 새 시장이란 의미가 더 강한 곳이다. 동남아 수출에 이상이 생기면 무역수지개선도 불투명해질게 뻔하다. 동남아 수출시장에 흐르는 이상기류는 한국기업이나 금융기관의 환차손 또는 부실채권보다 더 심각한 일인지도 모른다. [ 방콕=홍찬선 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7년 7월 16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