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섬우화] (199) 제5부 : 안나푸르나로 가는 길 <12>

"사장님, 저는 이번에 세계일주 여행을 떠나고 싶어요. 그러면 제가 없는 동안 재판을 하실 것 아니에요?" 윤효상은 펄쩍 뛴다. 자기가 아이를 만들 수 있는 이상 미스 리같은 상고출신의 아가씨와 재혼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녀는 아름답지도 않고 유치하고, 도무지 영신과 비교하면 호박꽃과 백합 같다. 윤효상은 환멸스러운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다가 화가 나서 액셀러레이터를 콱 밟아버린다. 휘청하면서 그녀는 차의 손잡이를 움켜잡는다. "윤사장님께서 이혼재판을 끝내시면 저는 다시 애를 밸 수 없을 지도 몰라요. 그리고 더 무서운 것은 의사가 더 이상 유산을 시켜서는 안 된대요" 그것은 거짓말이었지만 만사에 자신이 없는 그녀는 뱃속의 아이로 승부를낼 생각이었다. 그녀는 경리사원으로 세 회사를 거치는 동안 질 나쁜 보스들에게 거친 취급을 받았고 농락을 당한 경험도 두번이나 갖고 있다. 그녀는 피해망상에 걸려 있는 올드미스답게, 또 별로 내세울 것 없는 여자답게 선선히 말을 잘 듣지 않는다. 이번 케이스는 오히려 미스 리 쪽이 삐거덕거리는 영신과 윤효상 사이에 끼여들어 황금을 건지려고 시도했던 케이스였다. 그는 벌써 두번이나 윤효상에게 수술한다고 하고는 차일피일 미루고 있다. 돈도 3백만원이나 받았다. 그러나 그녀는 결코 윤효상의 아이를 지우지 않을 것이다. 그 아이야말로 그녀에게는 큰 행운을 약속하는 거액 복권같은 아이다. 그녀는 애교있게 웃으면서 윤사장을 힐끗 바라본다. 그의 얼굴은 다른 날과 달리 무섭게 일그러져 있다. "내 말 안 들을 거야? 아이를 갖고 있으면 나는 절대로 결혼할 수 없어.나는 말 안 듣는 여자가 제일 싫어. 죽이고 싶도록 싫어" "사장님은 독재자 기질이 있으세요. 그래도 저는 이 아이문제는 제가 살고 죽는 문제니까, 하라는대로 할 수가 없어요. 여행갔다 올게요" "피한다고 되는게 아니야. 네가 돌아오고나서 재판을 속개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아이는 점점 더 자랄 것 아닌가? 이 답답한 처녀야" 그는 폭언을 하지는 않았지만 그 억양속에는 무서운 폭력이 숨어 있다. 순간 윤효상은 생각한다. 그의 본성 속에 숨어 있는 무서운 악마가 그에게 가르친다. 사실 그는 아이 같은 것 그렇게 바라지도 않는다. 그녀를 죽여버려? 그러면 너는 이 고통에서 해방될게 아닌가 말이다. 악마는 속삭인다. 그녀 때문에 너는 재산을 더 많이 잃을 수도 있어. 그는 악마의 얼굴이 되면서 마주오는 큰 트럭을 주시한다. 뚫어지게 주시하면서 미스 리만 다치고 자기는 무사할 수 있는 각도를 재본다. 문제는 결심이다. 그가 타고 있는 차는 완벽을 자랑하는 안전제일의 고급차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8월 23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