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민불황' 풍속도] (12) ''나홀로 음주'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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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 좋아하는 D건설 박정식 과장. 사내에서 주당으로 통한다. 퇴근시간 정각 30분전 마음 맞는 후배에게 "퇴근하고 한잔"하며 한눈을 찡긋하는 것이 트레이드마크다. 그러나 요즘은 아니다. 무엇보다 회사분위기가 그렇지 않다. 감량경영으로 언제 누가 잘릴지 모르는 판에 회사동료들과 술마실 기분이안난다. 몸으로 느끼는 술값 부담도 전과 다르다. 판공비나 상여금은 올들어 대폭 줄었으나 공과금과 교통요금은 두자릿수나 올랐다. 아이들 학원비 옷값까지 생각하면 한푼이 새롭다. 차라리 일찍 집에 가 소주 한잔 마시는게 마음편하다. 대출업무를 담당하는 J은행 이모 대리.퇴근길에 집앞 슈퍼에서 소주 한병을 사는 것이 일과처럼 됐다. 지난해까지만해도 가끔 거래처에서 접대를 받기도 했지만 올해엔 정말 누구랑 술마신다는게 부담스럽다. 그래서 집에서 반주로 한잔 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그렇지 않으면 집근처 호프집에서 생맥주한잔하고 간다. 음주문화가 이처럼 달라지고 있다. 동네 카페나 호프집 포장마차 또는 자기집에서 혼자 술잔을 기울이며 시름을 달래는 "독주족"이 득세하고 있다. 말하자면 "나홀로 홀짝파"들이다. 한국인의 1인당 술소비량은 세계 3위. 불황여파로 회사 내외에서의 스트레스가 많아지면서 술을 찾는 사람들이늘고 있다. 그러나 여럿이 마시면 여러가지 부담이 돼 또다른 스트레스가 생긴다. "한번 얻어 먹는건 한번 빚을 진 셈이잖아요. 제돈으로 술을 사는 건 더더욱 부담이 되구요" (S전자 이민우 대리) 불황이 장기화되면서 회사의 회식수도 줄었다. D증권 여의도지점 자금팀의 경우 지난해까지만 해도 한달에 두번씩은 무슨 명분으로든 꼭 회식자리가 있었다. 그러나 올해에는 두달에 한번도 할까말까다. 참여율도 저조하다. 반이상은 갖가지 핑계로 빠져나간다. 술집매상도 뚝 떨어졌다. 고급 단란주점에서 대중적 호프집에 이르기까지 지난해 매상을 유지하는 곳은 장사를 엄청나게 잘하는 곳이다. 매상이 절반이상 격감한 곳이 부지기수다. 단체손님이 없어서다. 서울역 근처에서 호프집을 운영하는 김모씨는 "권리금을 포기하다시피 하고 가게를 내놓았지만 원매자가 없다"고 울상이다. 올해 전국 술판매량을 지난해와 비교해보면 이같은 추세가 잘 나타난다. 지난해 상반기 8천1백만상자가 팔렸던 맥주는 올해 같은기간에는 7천9백만상자밖에 안팔렸다. 잘나가던 위스키도 3백1만상자로 4만5천상자나 줄었다. 반면 소주만이 4천1백11만상자로 무려 4백만상자가 증가했다. 값싸게 취할 수 있는 소주를 많이 찾았다는 얘기다. 혼자 홧술을 마시는 세태도 소주판매량 증가에 일조를 한 것이다. 유난히도 함께 어울려 술마시는 것을 좋아하는 우리 한국인들. 그러나 불경기는 이런 음주관행까지 바꿔놓고 있다. "나홀로 홀짝파". 기죽은 샐러리맨의 다른 모습이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9월 8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