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추석과 대선홍보 .. 신경임 <시인>

추석이 내일 모레로 다가왔다. "대추 밤을 돈사야 추석을 차렸다/이십리 길을 걸어 열하룻장을 보러 떠나는 새벽/막내딸 이쁜이는 대추를 안준다고 울었다"라고 노천명 시인은 "장날"을 통해 추석을 노래했지만, 옛날의 추석은 대목장부터 비롯되기 마련이었다. 아직도 따가운 가을 햇살, 차일 갓을 들추는 바람, 일없이 이 좌판 저 좌판을 기웃대는 중늙은이들, 진열해 놓은 새옷 앞에서 발을 옮기지 못하는 처녀들, 햇밤이며 햇콩을 몇 됫박 펼쳐 놓고 진종일 앉아 손님을 기다리는 아낙네들. 추석하면 내 머리에 먼저 떠오르는 영상들이다. 그래서 나는 추석이 되면 고향에 가지 못하는 안타까움을 머지 않은 시골 대목장을 찾아가는 것으로 달랬는데 올해는 그러기가 두렵다. 전례없는 불경기라니 시골 대목장이 얼마나 더 썰렁해졌을까. 추석하면 내 머리에 떠로으는 또 하나의 그림은 빙 둘러앉은, 혹은 함께 성묘를 도는 집안 어른들의 모습이다. 우리는 당내집안들을 돌면서 차례를 올렸는데 차례가 끝날 적마다 어른들은 어른들대로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빙 둘러앉아 송편과 햇과일들을 먹었다. 이때 어른들은 이런 저런 세상 돌아가는 얘기들을 했는데, 내가 그들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 얘기들을 가지고서이다. 객지에 나가 살던 어른도 몇 낀 그 자리는 고향을 지키는 사람들이 정보를 얻는 자리요 고향을 지키는 사람들과 고향을 찾은 사람들이 또는 고향을 찾은 사람들끼리 의견을 나누는 자리였던 것이다. 내가 제주의 4.3사건의 참상과 이승만 대통령이 김구 선생을 죽였다는 유언비어를 들은것도, 김삼룡 이주하 박헌영에 대한 지식을 얻은 것도,이승만 대통령이 국민을 버리고 혼자서 한강을 넘는 바람에 수많은 사람들이 한강에 빠져 죽었다는 슬픈 소식을 들은 것도 이 자리에서였으리라. 차레자리를 옮기면서 얘기는 계속되고, 얘기는 성묘길로까지 이어졌는데,그사이 아저씨와 조카사이에 혹은 사촌들사이에 언성이 높아졌던 일도 나는 기억하고 있다. 그들의 말을 한마디도 놓치지 않으려고 귀를 세우고 누구는 좋은 사람누구는 나쁜 사람하고 주먹을 부르쥐던 일도 기억에 새롭다. 불경기라지만 올 추석에도 많은 사람들이 고향을 찾을 모양이다. 천만명이 훨씬 넘을 것이라니,우리나라 사람들의 고향사랑도 어지간하다는 느낌이다. 흥청거리는 대목장이야 볼 수 없게 되었지만, 고향을 지키는 사람과 고향을찾은 사람이, 또 고향을 찾은 사람끼리 차레자리에서 혹은 성묘길에서 정보를 얻고 의견을 나누는 풍속도는 여전할 터이다. 과연 정치하는 사람들이 이 대목을 허술히 보아 넘길 리가 없다. 추석연휴의 귀향정국이 대선 여론의 최대 분수령이 될 것으로 보고 대대적인 홍보에 나서리라 한다. 한데 문제는 그 홍보의 내용이다. 지금까지 배포된 홍보물을 보면 정말 낯이 뜨겁다. 우리 당 후보가 대통령이 되면 이러이러한 일을 하겠다는 공약은 아예 뒷전이고 있는 소문 없는 소문 다 들추어 상대방 후보에게 험집 내느라 입에 게거품을 물고 있다. 이 홍보물을 곧이곧대로 믿는 고향을 찾아간 사람 혹은 고향을 지키는 사람은 차레를 지내는 자리나 성묘길에서 누구는 거짓말쟁이, 누구는 빨갱이, 누구는 사깃군, 누구는 위선자 하고 똑같이 입에 게거품을 물리라,가령 이 얘기들을 듣고 있는 아이들이 옆에 있다고 생각해 보자. 그들의 머리에서는 오랫동안 아니 평생 대통령을 하려는 사람들은 모조리 거짓말쟁이요 빨갱이요 사깃군이요 위선자라는 생각이 사라지지 않으리라. 정치 불신이 우리의 보편적인 정서가 되지 않으리라고 누가 장담하랴,추석이 대선 정국 앞에 놓여 있다는 사실이 오히려 씁쓸하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9월 13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