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의열전] (38) 취금헌 박팽년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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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26년(1444)갑자는 박팽년이 28세 박중림이 45세 되는 해이다. 지난 초봄에 박중림은 부친상을 당하여 전의로 내려가 시묘를 살고 있었는데 박팽년은 사직이 허락되지 않아 2월16일에 최항, 신숙주, 이선로,이개, 강희안 등과 함께 "운회"를 번역하고 2월28일 왕과 왕비 및 세자를 호종하여 청주 초수리로 내려갔다고 5월7일에 왕을 모시고 환궁한다. 이때 박팽년은 세종의 허락을 얻어 조부의 상청이 있는 전의와 외조부가 있는 신창을 근친하고 왔던 듯한데, 서울로 돌아온 후에 외조부 김익생을 무남독녀인 그의 모친이 모시지 못하여 노년이 적막하니 박팽년 자신이 그 자식과 마찬가지로 양육되었으므로 가까운 곳의 지방 수령으로 나아가 외조부를 봉양하고자 한다는 내용의 "군수자리를 비는 장계"를 올린다. 이것이 대체로 7월경의 일이었던 듯하다. 이런 청이 받아들여질 리 없다. 집현전 젊은 학사들의 중심인물인 그를 세종과 문종이 놓아 보내겠는가. 다음 세종 27년(1445)봄에는 박팽년 조부의 3년상이 끝나게 되었던 듯 박중림이 3월24일부로 첨지중추원사로 복직되었다가 4월25일에 병조참의(정3품)로 옮기고 6월15일에 우승지가 된다. 이 해 5월에 박팽년은 손수산의 "무본재시권서"를 짓는데 여기서 성삼문의 별호가 눌옹으로 신숙주의 별호 범옹과 짝을 이루고 있었던 사실을 밝히고 있다. 9월 보름에는 은진 송씨의 중시조라 할 수 있는 쌍청당 송유(1389-1446)를 위해 "쌍청당기"를 짓는다. 쌍청당의 장자 송계사(1407-?)는 김종서의 형인 김종흥의 사위였다. 김종서가 박중림의 재종아우이었으므로 송계사와 박팽년은 3종 즉 8촌 남매간이 되는 셈이다. 세종 28년(1446) 병인은 박팽년이 30세 되는 해이다. 이 해 9월29일에 훈민정음을 제작 발표하면서 그 일에 집현전 부교리 박팽년이 참여하였음을 밝히는데 10월10일에는 교리(정5품) 박팽년 등이 대간의 처벌을 거두어 달라는 상소를 올리고 있어 그 사이에 교리로 승진한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해 11월4일에 뜻밖의 관재를 만난다. 박중림의 종 김삼의 아들인 김산이 갑자년(1444)에 전의에서 도망쳤다가 거지가 되어 나타났는데 이것이 김산이 아니라 죽산 현감 송중손의 비부 천장명의 아들 천보였다는 것이다. 이에 양가에서 친자확인 소송을 벌이게 되어 좌승지 박중림과 죽산현감 송중손이 모두 의금부에 갇히게 되고 박중림이 불리하게 되니 박팽년은 12월18일에 부친을 신구하려는 장문의 상소를 올린다. 그러나 이 사건은 해를 넘기어 세종 29년(1447)정묘년에 가서야 결판이 났는데 김산이라고 하던 천보는 박중림 종 김삼의 아들이 아니란 것이었다. 이에 4월5일 좌승지박중림은 벼슬을 빼앗기고 여산으로 귀양가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안평대군이 4월20일 밤 꿈에 도원에서 노닐고 나서 그 꿈 속의 경치를 안견으로 하여금 그리게 하고 자신은 그 기문을 지은 다음 박팽년에게 그서문을 부탁하니 안평대군을 통해 세종께 관용을 간청해야 할 처지에 있는 박팽년은 온갖 정성을 기울여 그 서문을 짓는다. 더구나 안평대군의 "몽유도원도기"에 의하면 자신과 함께 노닐었다 하지 않았던가. "몽유도원기"처럼 냉금홍지에 정간을 치고 안평대군 글씨와 방불한 송설체글씨로 단정하고 유려하게 써 내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일에도 백대가 내려가도 없어지지 않는 것이 있다 하나, 진실로 기괴한 사적이라 족히 사람의 이목을 움직일 만하지 않다면 어찌 능히 이와 같이 멀리 후세에 전할수 있겠는가. 세상에 전하는 도원의 고사는 시문으로 저술한 것이 심히 많지만 나는 나기를 늦게 해서 친히 접해서 보고 듣지는 못하였다. 오직 이로써 그답답한 데로 이끌린 것이 오래이더니 하루는 비해당이 지은 바의 몽유도원기를 나에게 보이는데 사적이 기이하고 문장이 오며하며 그 시내와 언덕의 그윽한 형상과 복숭아 꽃의 멀고 가까운 자태가 옛날의 시가낸용과 다름이 없다. 그리고 내가 또한 좇아 노니는 대열에 있다 하는 지라, 내가 그 기문을 읽다가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고 옷깃을 여미며 탄식하여 이르기를 "이런 일이 있을까. 일이 매우 기이하구나"하였다. 동진은 지금으로부터 수 천년이 지나갔고 우리나라는 무릉으로부터 만여리나 떨어져 있는데, 만연리의 해외나라에서 수 천년전 미로의 땅을 볼 수 있고 이어서 당시의 물색과 서로 접할 수 있다니 기괴하기가 우심한 것이 아니겠는가. 옛 사람이 말하기를 신명을 만나면 꿈이 되고,형상을 접하면 사실이 된다 하기도 하고, 낮에 생각하고 밤에 꿈꾸니 신명과 형상이 만난 것이라 하기도 하였다. 대개 형상이 비록 밖에서 사물과 만나 이루어진다 하나 안에서 신명이 그것을 주재하지 않는다면 또한 어떻게 형상의 접합이 있겠는가. 이로써 우리의 신명이 형상에 의지해서 서지 않고 사물을 기다려서 존재하지 않으며, 느껴서 드디어 서로 통하고, 치달리지 않고도 빠르며,언어와 문자의 미칠 바가 아니라는 것을 알수 있다. 어찌 깨었을 때 한 바는 참으로 옳고 꿈속에서 한 바는 참으로 그르다 하겠는가. 그리고 하물며 사람이 세상에 있는 것도 또한 한 꿈속임에랴! 또 어찌 옛 사람이 만난 바는 깨어 있는 것이 되고 지금의 만난 바는 꿈이 되어 옛 사람만 홀로 그 기괴한 흔적을 다 차지하고 지금 사람은 도리어 미치지 못해야 하나. 깨고 꿈꾸는 것에 대한 논의는 옛 사람도 어려워 한 바이니 내가 어찌 감히 그 사이를 분별해 내려 하겠는가. 이제 그 기문을 읽고 그 일을 생각하므로써 내가 예전에 멀리 나가 놀려고 했던 뜻을 위로할 수 있으니 이를 다행으로 삼을 뿐이다. 비해당이 형상을 그리고 기문을 지어 장차 사림사이에서 시를 구하고자 하는데, 내가 그 좇아 노니는 대열에 있었다하여 서를 붙이라고 명하니 내가 감히 글이 졸렬한 것으로 사양하지 못하고 억지로 이를 쓴다. 정통 12년 4월 일 봉직랑 수집현전교리 지제교 경연부검토관 평양 박팽년 인수가 머리를 조아리며 삼가 서한 이 해는 식년시가 치뤄지는 해이다. 그래서 집현전 학사들이 모두 중시에 응시하는데 8월23일 방방결과 수찬 성삼문이 장원을 차지하고 교리 박팽년은 을과 2등으로 급제하였다. 이에 세종은 박팽년의 유가와 경연을 핑계대고 여산에 귀양가 있는박중림에게 역마를 내주어 급히 상경시키라는 명령을 전라감사에게 내린다. 그리고 박팽년 따님의 혼사를 핑계대고 박중림을 9월3일까지 배소로 도로 내려보내지 않으니 사간원에서 이를 규탄하는 상소를 올린다. 9월29일에 박팽년은 성삼문, 신숙주, 이개 등과 함께 "동국정운"6권의 편찬을 완성해 내기도 한다. 다음 세종 30년(1448)무진년은 박팽년이 32세가 되는 해인데 지난 해 중시를 치른 다음에 성삼문과 함께 직집현전(정 4품)으로 벼슬이 올라서 집현전을 사실상 주도해 나가고 있었다. 세종은 그런 박팽년의 체면을 보아 4월11일에 박중림을 사면하고 4월29일에 직첩을 돌려준 다음 7월1일에는 공조참의(정 3품)로 다시 기용한다. 세종 31년(1449)1월5일에는 박중림을 병조참판(종 2품)으로 올리고 다시 12월26일에는 박중림을 경기도 관찰사로 내보낸다. 이때 박팽년은 직집현전으로 세자 강서원 좌익선(정 4품)을 겸하고 있었다. 세종 32년(1450)2월17일에 세종이 돌아가자 2월22일에 왕세자가 즉위하니 이가 곧 문종이다. 문종은 즉위하자 사부인 박중림과 도반인 박팽년을 특별히 우대하기 시작한다. 7월6일 최초의 인사행정에서 박팽년을 집현전 직제학(정3품 당하관)으로 올리고 세자강서원 우보덕을 삼는다. 그러나 이때 세종 말년이래 세종을 불교로 귀의하게 한 승 신미를우국이세원융무애혜각존자로 봉하자 박팽년은 7월15일 이의 부당성을 지적하면서 신미가 영동에 사는 그 늙은 아비 김훈을 고기 먹은 참회로 부처님께 일백배를 시켜 죽게 하였다는 등의 과격한 말을 하다가 문종의 격노를 사서 7월16일 고신을 박탈당한다. 이때 문종은 이렇게 말하였다. "인신의 진언은 마땅히 충후해야 한다. 네가 선왕께 시종한지 이미 오래고 지우도 실로 깊었었는데 사실이 아닌 일로 미친듯이 조급하게 상소하여 말이 선왕을 핍박하였으니 내가 심히 그그게 여긴다. 의당 유사에 내리어 따져 묻고 치죄해야 하겠으나 내가 차마 하지 못하겠어서 다만 고신을 거두는 것이다" 이에 집현전 응교 이개와 수찬 유성원 등이 연일 상소하여 박팽년과 함께 벌받기를 청하고 사간원과 사헌부에서도 연일 박팽년을 죄주는 것이 부당하다고 상소하며 신미의 "우국이세"라는 존호를 삭제하라고 요청한다. 이에 할 수 없이 문종은 9월22일에 박팽년의 고신을 돌려주게 한다. 그러자 10월10일 박팽년은 인재의 등용과 수령의 교체, 학교의 진흥에 관한 장문의 상소를 올려 그 폐해를 바로 잡기를 청한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9월 19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