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 산업개편의 현실적 추진 .. 배순훈 <대우전자 회장>

현 문민정부 개혁의 핵심은 금융실명제이다. 한때 금융실명제 실시를 반대한다고 하면 부정부패로 축재한 재산을 숨길수 없는 사람으로 취급하기도 했다. 금융실명제를 통하여 전직 대통령의 수뢰사건까지도 밝혀졌으니 그런대로 성공한 개혁일까. 실명제가 아니더라도 전직 대통령의 수뢰사건은 밝힐 수 있었고, 실명제실시 이후에도 정권 부근에서 수뢰비리 사건은 계속 발생했고 그런 사건은 실명제에 의하여 밝혀진 것도 아니라는 반론도 있다. 금융실명제는 실시 이전보다 훨씬 많은 양의 정보를 수집하고 처리-분석해야 하는 제도이다. 기업 은행 세무행정부서 등이 이런 정보업무를 실제로 부담하는 기관이다. 세무행정은 고객인 국민의 공정한 세금을 부과하는 서비스라기 보다는 세금을 걷어 국가재정을 부담하는 정부업무를 담당하는 기구로, 정보량증가로세수확보에 별로 지장을 받지 않았다. 은행은 이미 실명제를 할 수 있는 정보처리능력을 갖추고 있었을 뿐더러 실명제로 불분명한 거래가 감소하여 실질적으로는 처리 정보량이 감소했다. 정보처리면에서 가장 큰 영향을 미친 부문은 기업인데, 기업은 준비없이 하루아침에 빅뱅으로 실명제로 인하여 일어난 막대한 정보처리 부담을 담당하게 되었다. 중소기업이 가장 힘들었던 이유이다. 개혁 또는 경제개편은 기구나 사람들에게 변화이므로 항상 시간과 변화에 대처하기 위한 자금이 필요하다. 그러나 변화후 발전을 가져온다면 변화를 효율적으로 일으켜야 한다. 적절한 자금을 투입하고 변화되는 기구에 적절한 시간적 여유를 주어야 한다. 일본 정부는 에너지 파동이나 엔고시기에 재정적자를 크게 내면서 민간에게자금을 공급하는 것을 자주 볼 수 있었다. 개혁을 준비하는 기관에서는 개혁추진 계획도 마련해야 하지만 변화에 필요한 시간과 자금도 마련해야 한다. 지금은 경제가 어려운 때이니 산업개편을 서둘러야 한다는 주장이 많다. 첨단산업 고부가가치 산업으로 산업구조를 개편해야 한다. 기술집약형 중소기업 육성방안이 실시중이다. 벤처산업은 시장경쟁이 자유스럽고 치열한데서 발생하는데 정부의 육성정책은 시장개입이 아닐까 우려되기도 한다. 정부의 산업육성정책은 산업화과정에서 유효했지만 자유시장기구를 촉진하는 선진경제에서는 또 다른 시장개입이 될 수 있다. 한보와 기아사태에 관하여 정부는 관여하기를 주저했다. 그러나 기업의 개편에는 자금이 필요하기 때문에 협력업체의 부도를 막기 위하여 진성어음결제를 할 수밖에 없었다. 과거 한보와 기아의 여신에는 직간접적으로 정부의 영향이 있었으므로 현안 문제에서도 채권은행의 자율적인 해결은 현실적이 아니다. 따라서 정부개입이 불가피하다면 기업의 개편이 효율적으로 진행될 수 있도록 자금투입과 시간적인 여유를 능동적으로 마련해야 한다. 우선 채권은행단에서 대출금을 변제할 수 있는 경영진을 선택해야 하고 정부는 정부책임으로 새로운, 또는 기존 경영진을 유지하는 것이 최선이라면 그 경영진이 회사의 정상적인 운영을 회복할 수 있는 기간동안의 자금을 지원하여야 한다. 기업내부의 개편은 그 기업의 경영진이 책임지고 추진해야 한다. 기아의 경우 국내시장의 변화가 자본구조의 취약으로 바로 현금유통에 문제를 가져올 것이므로 그 기업 내부의 기술 시설 인력을 효율적으로 활용한다면 다시 경쟁력을 회복할 수 있다. 다음으로 기아 경영진의 역할은 기아그룹의 사업개편을 통하여 핵심사업의 재무구조를 견실하게 하고 있는 시설 기술을 최대로 활용할 수 있도록 경영구조를 개편하는 일이다. 이런 일들은 반드시 제조의 기업체가 아니더라도 능력있는 최고 경영자만 선택하면 독립적인 전문경영진이 구성될 수 있다. 현재 대규모의 부실한 재무구조를 가진 기아를 다른 기업체가 인수한다면 은행채무에 크게 의존하는 국내의 어떤 기업도 부실화될 가능성이 있고 그 기업에 있는 기존 경영진을 차출하여 새 경영진을 구성하면 그 기업의 능력을얄팍하게 하여 경영의 방만함만을 조장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우리나라의 기존 자동차회사들에는 기아의 인수-합병이 이미 가지고 있는 자동차사업에 중복투자 효과로 재정적 부담만 추가되는 셈이다. 한보철강의 경우도 포철이 인수하는 것이 해결책은 아니다. 포철도 세계시장에서 강력한 경쟁의 도전을 헤쳐나가야 하는데 한보철강의 부담까지 질 수 있는 여유가 있다는 판단은 낙관적이다. 한보철강의 규모보다 훨씬 작은 철강회사도 시장경쟁을 효율적으로 해내고 있다. 따라서 한보철강 문제 역시 제3자 인수보다는 채권은행단과 정부가 유능한 경영진을 선정한후 자체 경영진의 노력으로 회사가 회생할 수 있도록 시간적 여유를 주고 일시 필요자금을 지원해야 한다. 산업개편은 기업의 경영진이 자율적으로 시장경쟁력을 강화하는데 필요한 시간적 여유를 주고 일시적인 소요자금을 거시적인 통화관리와 연계하여 정부가 능동적으로 지원해야 신속히 이루어질 수 있다. 자유시장 경제로의 이전은 경쟁력있는 기업들이 있어야 이루어질 수 있다. 정부는 시장개입은 안하면서도 사장되는 시설과 인력이 잘 가동될 수 있도록 지원하는 미묘한 역할을 맡아야 하는 중요한 시기이다. 소수의 대기업들이 경제의 대세를 좌우하는 우리경제가 시장경쟁체제로 가려면 정부의 눈에 보이지 않는 강한 역할이 필수적이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9월 23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