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광직칼럼] '귀거래사'의 또다른 의미 .. <출판국장>

조선왕조의 세번째 왕인 태종은 권력의 무상함을 어느 누구보다 뼈저리게 느꼈던 인물이다. 피비린내 나는 "왕자의 난"을 두번이나 평정한 뒤에야 겨우 왕위에 오른 그는 부왕인 태조의 노여움을 끝내 풀지 못한 회한과 방석 방간 두 형제를 죽인 죄책감을 안고 평생을 살얼음 위를 걷듯 스스로를 경계하며 살았다. 그가 제일 두려워 했던 것은 거듭되는 한재와 홍수 등 천재지변이었는데 그때마다 그는 식음을 전폐하고 극진히 하늘에 제를 올렸다. 고통스러운 속죄의 나날이었다. 태종이 등극한지 18년째 되는 1481년에는 그에게 참기 어려울만큼 고통스런 일들이 연이어 일어났다. 그해 2월 총애하던 아들 성녕이 14세의 어린 나이로 죽자 그는 정붙일 곳마저 잃었다. "너는 일찍이 하루라도 나의 좌우를 떠난 적이 없었다. 아아, 말에는 다함이 있으나 정에는 끝이 없는데 너는 그것을 아는가 모르는가" 성녕대군을 사제하는 교서를 읽으며 태종은 왕답지 않게 흐느꼈다. 성녕을 잃은 태종은 마치 새끼를 키우는 호랑이 같이 엄하게 다루려 했던 세자 양녕이 자신의 뜻과는 정반대로 방탕하여 속을 썩이자 같은해 6월 세자를 폐하여 광주로 보내면서 또 한번 통곡했다. "태종실록"에는 그 이후로는 그가 벼락만 쳐도 무서워했고 오뉴월에 서리만 내려도 몹시 당황했다고 전한다. 설상가상으로 지병인 풍질마저 도져 완전히 실의에 빠진 그는 그해 8월 세자인 충녕에게 옥쇄를 넘겨주고 미련없이 왕좌를 떠나 잠저로 향했다. 그의 나이 52세때였다. 어렵게 차지했던 권좌를 스스로 벗어던지고 자유인이 된 셈이다. 태종이 남긴 업적이야 어찌됐든 그 개인에게 왕좌는 결코 행복한 자리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태종의 경우와는 다르지만 "전국책"에는 가난했지만 야심에 차있던 한 정치가의 이야기가 실려있다. "가난 콤플렉스"에 걸려 일생을 망친 인물의 이야기다. 전국시대의 "합종연횡설"의 대가였던 동주의 소진은 논 한마지기도 없는 가난뱅이로서 권세와 부귀를 목표로 음부경을 공부했다. 책을 읽다가 잠이 오면 송곳으로 허벅지를 찔러가며 공부한 결과 일종의 독심술인 취마법을 익힌뒤 합종설을 설득시킨 결과 여섯나라의 재상이 되어 6국의 재상 도장을 허리에 차고 다녔다. 그러나 끝내 권세와 부귀에 휘말려버린 그의 말로는 비참했다. 결국 연나라에서 문후의 부인과 사통했다가 제나라에서 자객에 암살당하고 말았다. 권력자의 말로를 보여주는 좋은 예다. 오는 12월 대선을 앞두고 바야흐로 정치계절을 맞은 우리사회는 요즘 내노라 하는 대선후보들의 언행 하나하나가 사람들의 주목을 받고 있다. 그러나 그들중에 누가 이율곡이 말한 것처럼 사회이념의 구현자로서의 자격을 갖춘 참선비인지는 아직 분명치 않다. 누가 "조정에 나가면 한 때 도를 행하여 백성들에게 화락한 즐거움이 있게 하고, 물러나면 만세에 가르침을 드리워 배우는 이로 하여금 큰 잠에서 깨어나게 하는 사람"인지는 미지수다. 요즘 그들의 경륜과 언행, 그리고 속속 드러나는 과거의 행실을 보면 과거로 출세한 재사 문사는 있어도 진사와는 거리가 멀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돌아가자, 전원이 장차 황폐하려 하니 어찌 돌아가지 않겠는가" 첫 머리가 이렇게 시작되는 유명한 도연명(365~427)의 "귀거래사"는 관직을 훌훌 털어버리고 낙향으로 돌아가는 심경을 4장으로 표현한 글이다. 굳이 요즘식으로 말하면 세속과의 결별을 선언하는 선언문이나 퇴관성명서라고 해도 좋을성 싶다. 이 글의 제1장에서 도연명은 "실로 길을 잃었으나 아직 멀리가지 않았으니 지금이 옳고 어제는 잘못이었음을 알았노라"고 고백하면서 정신의 해방을 노래한다. 이어 제2장에서는 고향집에 당도해 자녀들의 영접을 받는 장면을 그리고 3장에서는 "세상이 나와 서로 맞지 않으니, 다시 수레를 타고 무엇을 구하겠느냐"며 세속과의 결별을 선언한다. 그리고 마지막 장에다 그는 전원속에서 자연의 섭리를 따라 목숨이 다 할때까지 살겠다는 간절한 뜻을 담았다. 그의 자서에 의하면 집이 가난하고, 자식들이 많아 먹고 살기 위해 현령이 됐으나 평소의 뜻에 어긋나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되어 있다. 그러나 또 다른 기록에는 역성혁명으로 진나라가 송나라로 되면서 두 군주를 섬기지 않기 위해 사임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가 정절지사로 불리는 까닭도 그 때문이다. "귀거래사"에는 "돌아가자"는 말이 딱 두번 나온다. 주자의 주석에 따르면 마땅히 돌아가야 할 귀처중 하나는 "높은 뜻을 기르고 절개를 지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천명을 지키는 것"이다. "귀거래사"를 이런 관점에서 보면 도연명의 고결한 인품을 되새길 수 있다. 주자가 그를 "어질다고 이를만 하다"고 높이 평가한 점도 주목된다. 도연명이야 말로 주자에게는 참지도자의 자격을 갖춘 인물로 보였던 모양이다. 대통령의 책무는 무겁다. "역사 바로 세우기는 국민의 자존을 회복하고 나라의 밝은 앞날을 여는 "명예혁명"이라고 당당하게 국민의 동참을 호소했던 김영삼 대통령도 높은 점수는 받기 어려울 것 같지 않는가. 아직도 자기의 신념이 곧 역사의 지상명령인 듯 착각하고 대통령이 다 된것처럼 참모들을 몰고 다니는 대선후보들에게 "귀거래사"를 다시 한번 꼼꼼히 읽어보기를 권하고 싶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10월 15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