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 취업전선] (2) "중하위권 기회조차 없다"
입력
수정
김주혁(D대 법학4)씨는 요즘 새벽 4시면 일어난다. 학교 도서관에 자리잡기 위해 집을 나서는 시간은 5시. 새벽공부하는 사람치고 책가방은 홀쭉하다. 영어책 한권과 취업정보서가 전부다. 도서관에서 새벽을 보내고 아침 9시가 조금 넘으면 교무처에 들른다. 혹시 어제 기업에서 학교로 보내온 추천장이 있을까 해서다. 한장도 없다. 학과사무실로 발길을 돌린다. 역시 마찬가지다. 세칭 일류대에도 예년보다 추천장이 많이 줄었다. 김군이 다니는 학교는 중위권대라서 그런지 추천장 구경하기가 꽤나 어렵다. 행여 한두장 온다해도 자신의 몫으로 돌아온다는 보장이 없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서" 날마다 돌아본다. 영어책과 씨름하다가 도서관문을 나선 시간은 오후 4시. 강의에 들어가려는 게 아니다. 강의실에서 교수님 얼굴본지는 오래됐다. 모은행에 다니는 선배를 만나기로 했다. 인사과에 일하고 있는 선배에게 정보를 얻기 위한 것이었다. 서류전형에서 통과하기 힘들 것이라는 말만 들었다. 작년까지만 해도 법학 전공자를 한두명씩 꼭 뽑았는데 올해는 인력감축정책으로 그나마 없애려 한다는 설명이었다. 무거운 마음으로 시내중심가의 대형서점에 들른다. 취업관련서적을 뒤적이다가 6시쯤 영어학원으로 간다. 어학실력연마가 취업의 필수조건이기 때문이다. 특히 지방대생들에게는 올해가 그야말로 사상최악의 해로 각인되고 있다. 지방K대 화학과를 졸업한 박성민씨는 일자리를 찾아 방황한지 2년째다. 취업박람회가 열리면 만사제치고 서울로 올라온다. 열심히 다리품을 팔며 원서를 냈다. 그러나 전보나 전화가 오지않는다. 합격통지는 고사하고 면접까지 간적도 거의 없다. 시간이 갈수록 지방경제육성이니 지방대학 육성이니 하는 정부의 시책은 겉돌고 있을 뿐이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소외감과 피해의식마저 맛보게 된다. 많은 대학생들이 이처럼 취업기회조차 잡지 못하고 있는 것은 기업들의 무시험선발도 한몫을 했다. 문민정부들어 교육개혁연장선상에서 기업들에 필답고사보다는 서류전형과 면접에 의한 채용을 권장한 탓이다. 많은 기업들이 이 방식으로 바꿨고 그 결과 중위권대나 지방대학생들에게는공개경쟁기회마저 줄어들게 됐다는 불만이 사방에서 제기되고 있다. 그야말로 올해 대졸예정자는 "4학년"이 아니라 "사학년"이다. 대학문을 나서도 갈데가 없다. 거의 목을 매달면서 취업경쟁을 하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이 됐다. 이제 조건따지고 보수따지고 하는 일은 상상하기도 어렵다. 서울에서 대학다녔지만 지방에서 근무하라고 해도 OK다. 연봉을 비교해 기왕이면 돈 많이 주는 곳을 택하겠다는 생각은 이미 사치가 됐다. 회사의 장래성도 그리 중요한 일이 못된다.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니라는 "3불문"이 올 취업현장의 바이블이 되고 있는 것이다. 올해 입사문턱에 오르지 못할 24만명의 취업희망자. 이중 상당수는 아예 경쟁의 기회조차 갖지 못한 사람들이다. 그래도 이들은 다시 "취업예비군"으로서 기회를 기다릴 게 분명하다. 그나마 내년에는 꼭 된다는 희망도 없다. 기다림의 시간은 고통의 연속일 수밖에 없다. 수많은 젊은 실업자군의 아픔은 그들에게만 국한되는게 아니라 우리 사회 전체의 짐이기도 하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10월 22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