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섬우화] (256) 제8부 누가 인생을 공이라 하던가? <16>

그녀는 어떻게 할까 망설이다가 이왕 이렇게 된 이상 빨리 진행하고 나서 다음 일을 생각할까 하는 만용이 생긴다. 그러나 아냐, 그래도 남편이 사망한후 아직 남자를 집안에 들인 일이 없고, 더구나 밤 열두시가 다 되었으므로 상당히 난처했다. 그러나 그녀는 사실 좀 초조하다. 이 남자는 나이가 꽉 찬 노총각이고 자기는 불안하고 외롭다. 그녀는 입술을 깨문다. 아무 것도 아닌 사이가 되는 한이 있더라도 결코 이 남자에게 예외로 문을 열지는 말자,집안에는 둘째딸 미경이도 있고 미아도 있다. 미아는 이해가 많은 아이지만 미경이는 충격을 받을 수도 있다. 그녀는 박광석에게 칼로 짜르듯 냉정하게 말한다. 그것은 얼음 조각이 떨어져 내려오듯 냉혹한 매너였다. 그러나 그 말을 하면서 그녀는 눈을 질끈 감았다. 어눌하게 그녀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는 박광석이 죄없는 아이처럼 측은해서 였다. "오늘은 아무래도 너무 늦었어요. 내일 내가 정식으로 오늘의 답례를 하겠어요. 그럼 됐지요? 안녕히 가세요" 그녀는 그를 문밖까지 배웅하면서 그에게 서글픈 듯한 미소를 띠었다. 왜 그랬을까? 도무지 그녀답지 않다. 그 순간 박광석은 맹호같이 덤벼들어 그녀를 꽉 껴안고 입을 맞춘다. "애스피린을 먹고 속 좀 차리겠습니다" 그리고는 물을 업질렀을 때처럼 도망가버린다. 갑자기 당한 키스세례에 어색해진 공인수는 그러나 그의 소년다움에 흠뻑 매혹된다. 그가 어찌나 입술을 세게 빨아댔던지 아랫입술에 푸른 멍이 들어버렸다. 매혹적인 부드러운 키스가 아니고 그렇게 무지막지한 키스를 하다니,그녀는 그의 순진함에 다시 한번 정신이 얼떨떨해서 한참을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그가 너무도 단순하고,기교없이 물을 자꾸 엎지르던 일이 그녀를 즐겁게 한다. 공인수는 회심의 미소를 짓는다. 그렇게 세련되지 않았으니까 아직 장가도 못 들고 저러고 있는 것 같아 은근히 그 모든 행동들이 밉지가 않다. 나이 어린 남자에 대한 연상의 여자들의 너그러움일까? 그녀는 자기가 어떻게 된 것이 아닌가 하고 자신을 돌아볼 시간을 아주 오래 갖는다. 거의 밤 세시가 돼서야 잠이 들었다. 그것도 위스키를 철철 넘게 한잔 들고나서. 내일 일은 내일 생각하자. 얼마나 생각하고 또 생각하다가 나이 50이 가까워 왔는가? 내일 모레면 50이라는 생각은 그녀를 그토록 억울하게 하고 분통 터지게 한다. 재혼을 할 거라면 50이 되기 전에 하자.50이 넘으면 무엇인가 여자로서 아무 쓸모 없고 매력 없는 사람이 될 것이란 이 강박관념은 도대체 무얼까?그녀는 아침에 일어나면서 햇살이 눈부셔서 커튼을 열지 못 하고 우두커니 누워 있었다. 언제나 혼자서 자는 침대지만 오늘따라 유난히 허전해 보인다. 허망하고 술프고 억울하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10월 3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