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여록] 한국 금융위기의 본질

지난 10일자 뉴욕 타임즈 3면에는 "불안해서 못살겠다. 고용안정 보장하라"라는 피킷을 든 한국인의 사진이 아주 큼지막하게 실렸다. 모은행 노조가 임금인상과 고용안정을 요구하며 파업을 벌이고 있는 장면이었다. 이 은행의 노조 위원장은 뉴욕 타임즈 특파원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 것으로 돼 있다. "은행 경영이 어렵다고는 해도 어차피 정부가 구제해줄텐데 무슨 걱정인가. 은행이 망하면 한국 경제에 엄청난 문제가 야기된다. 외국에서는 어떻든 서울같은 곳에서는 은행의 부도는 생각키 힘들다" 한데 이 기사의 핵심은 특정 은행의 경영이나 파업에 관한 "한가한"기사가 아니었다. 한국의 30대 대기업그룹중 7개 그룹이 부도사태를 맞았고 그 결과로 은행들의 악성대출 비율이 30%선으로 치솟는 등 한국경제와 금융이 심각한 위기로 치닫고 있다는게 요지였다. 바닥을 모른채 고꾸라지고 있는 외환시장에 한국은행이 연일 개입한 결과로 한국의 외환보유고는 3개월 수입분에도 못미치는 3백억달러 수준으로 떨어져 있다는 "토"도 달았다. 뉴욕 타임즈가 그런 기사에서 큼직한 사진과 함께 한 은행 노조의 "임금 인상과 고용 안정"요구에 관한 대목을 집어넣은 까닭은 무엇일까. 나라 경제가 어떻게 돌아가건 말건 자기 직장이 부실화되건 간에 "내몫만은 챙겨야겠다"는 정서가 한국의 은행원들에게 심어져 있다는 메시지를 전하려는 건 아니었을까. 그것도 입에 달 때는 "은행 경영 자율"을 목청 높여 요구하고 상황이 불리하다 싶으면 "정부 지원"에 매달리며 말이다. 뉴욕 타임즈의 이 기사는 때마침 국내 신문들이 일제히 보도한 "금융개혁 법안 국회서 좌초 위기"라는 기사와 맞물려 윌 스트리트의 한국담당 뱅커들의 눈길을 붙들어맸다. 하필 이 시기에 몇명의 국내 은행장들이 뉴욕에 머물며 미국 메이저은행 회장들을 상대로 "고공로비"를 펴고 있다. 그런데 자구노력은 커녕 은행원들이 "내몫 지키기"에 혈안이 돼 있는 것으로 비춰지고 말았으니 딱한 노릇이다. "이제 윗분들은 한국 사람들이 뭐라고 해도 절대 믿지 않는 분위기"라고 한숨을 내쉬는 체이스 맨해턴은행의 한국계 간부 앞에서 그저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이학영 (한국경제신문 1997년 11월 13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