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24일자) 4자회담에 임하는 자세
입력
수정
한반도 평화정착방안을 논의하기 위한 4자회담 본회담이 마침내 오는 12월9일 열리게 된 것은 잘만 하면 남북관계 개선과 평화통일의 유리한 환경을 조성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환영할 만한 일이다. 더구나 그동안 본회담을 가로막는 최대의 걸림돌이었던 의제선정에서 북한이 주한 미군철수와 미-북 평화협정체결을 의제에 포함시켜야 한다는 주장을 철회하고 한국측이 수정제의한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과 긴장완화를 위한 제반문제"라는 단일 의제를 받아들인 것은 나름대로 속셈이 있겠지만 일단 긍정적으로 평가할 만하다. 짐작컨대 4자회담을 통한 협상의 문을 열어두는 것이 대미 관계개선과 국제사회로부터의 식량지원 확보에 도움이 되고 김정일의 당총서기 취임후 평화애호 이미지 과시 등에 유리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한-미 양국은 본회담개최 합의와 관련, "이면계약"이 없다고 밝히고 있지만 세계식량계획(WFP) 등 국제기구를 통한 대규모 식량지원을 약속하는 등 북한에 사실상 반대급부를 보장했을 가능성이 높아 귀추가 주목된다. 당장 금주내에 발표될 유엔의 내년도 대북한 식량원조규모와 회원국별 지원요청 규모를 보면 반대급부의 윤곽이 드러날 것이다. 어쨌거나 한반도에 정전체제가 등장한지 44년만에 정전체제의 주요 서명국 또는 당사자들이 한자리에 모여 이를 항구적인 평화체제로 바꾸기 위한 협의를 시작하게 됐다는 것은 역사적 의미가 크다. 그러나 4자회담의 성사는 북한을 마라톤의 출발점에 끌어들인 것에 불과하다. 과거의 행태로 보아 북한은 본회담에서 어떤 주장을 들고나올지 예측이 불가능하다. 북한은 그들의 요구를 전략적으로 일시 유보했을지도 모른다. 자칫하면 회담이 기본의제에서 벗어나 북한의 요구대로 식량지원과 미-북 관계개선 쪽으로 흘러갈 가능성도 없지 않다. 회담의 변질을 막기 위해서는 4자회담의 실질 당사자인 남북한이 대화의 주체가 돼야 한다. 평화협정도 남북한이 체결하고, 미국과 중국이 지지하는 형태가 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북한이 원하는 미-일과의 관계개선을 위해서도 남북한관계에 진전이 있어야한다. 4자회담은 정권교체기에 경제난까지 겹쳐 국내 사정이 매우 혼란한 상태에서 열리게 됐다. 요즘의 국정 표류현상으로 보아 자칫하면 상대방의 진의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아무런 대책도 없이 회담에 임하지 않을까 걱정된다. 이런 때일수록 당리당략이나 정략을 배제하고 확고한 원칙에 따르는 것이 좋다. 한반도의 항구적인 평화정착은 정권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민족의 장래가 걸린 중대사안이다. 또 다자회담에서 합의되는 사항은 "외교의 연속성 원칙"때문에 정권이 바뀐다 해서 파기할 수도 없는 일이다. 정부는 우리측이 제의한 회담에 북한측이 사실상 백기를 들고 들어왔다는 "외교적 한건주의"에 들뜨기 보다는 북한의 속셈을 꿰뚫어보는 치밀하고도 신중한 자세로 임해야 할 것이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11월 24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