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모임] 김홍권 <경실련 경제정의연 부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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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해방된 해는 초등학교5학년 때였다. 얼마전 어떤 TV방송사는 1925~35년생이 우리시대에 가장 어려움을 많이 겪고 오늘날 경제발전의 기초를 다진 세대로 조사됐다고 발표한바 있다. 우리는 전북 김제 용지초등학교 14회 재경 동창들로 모임이름도 없이 매월 만나온지 20여년이 흘렀다. 연령 관계로 과거 회고적 성향이 강하지만 현실비판과 고궁산책, 1년에 두어번 지방여행을 다니며 우의를 다지곤 한다. 우리 모임을 헌신적으로 주도해온 회장격인 김기전사장은 목공소로 대성한 신실한 친구로 모교와 면사무소 신축을 돕는 등 고향일에도 열심이다. 모임에 활력을 주는 이근택 형제와 박성무 나을식 최윤규형제는 모두 6.25참전용사이고 그중 이근택 형제는 1115고지에서 한쪽 다리를 잃었지만 유한킴벌리에서 정년이 되어 지금은 빌딩 관리자로 성실히 살아가고 있다. 박성무 형제도 포병으로 참전한 후유증으로 청력을 많이 잃고 아무런 보상도 못받았지만 페인트 도장기술을 갖고 오늘도 바삐 전국건설현장을 누비고 있다. 우리는 이 친구 봉고차로 장거리 지방여행을 다니는데 그의 허벅다리에는 소염진통제인 대형 파스가 다닥다닥 붙어있는 것을 보게 된다. 반장을 했던 나을식 형제는 북한군 포로로 잡혔다가 석방되어 면장을 지내고 우리 모임의 회계를 맡으며 사진광고업체인 국제와이드(주)대표로 활약하고 있다. 최윤규 형제는 임상병리사겸 주유소업을 하며 김회장과 함께 우리모임의 재정을 돕고 있고, 최영식형제는 야채상을 평생동안 해오면서 마신 주량이 우리를 가끔 불안하게 하지만 그의 인간성이 그것을 덮어준다. 그외에 중앙대 교무부처장을 지낸 정성수, 홍일점인 주부 이상임친구가 가끔 합류하여 우리 모임을 빛내준다. 일제하 어려운 시기를 같이했던 죽마고우들! 그것도 나보다 나이가 많아 참전하게 되어 큰 부상을 당하고도 꿋꿋하게 창조적으로 살아가는 우리친구들을 대할 때면 나는 단지 그들의 어깨를 주물러 안마를 해주거나 현실비판의 소리를 들어주는 일과 사진사 노릇하는것 이외에는 아무 것도 할 일이 없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12월 10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