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도널드 그레그 <전 주한미국대사>에게 듣는다

"누가 뭐래도 한국의 대기업들은 고도 성장의 세계적 모델을 보여 왔습니다. 국가적인 외환-금융위기를 맞아 구조조정을 불가피하게 요구받고 있지만 이것은 대기업들에게 또다른 도약을 위한 기회가 될 것입니다" 부시 행정부에서 지난 93년초까지 주한 미국대사를 지낸 미국 최고의 "한국통" 도널드 그레그 코리아 소사이어티 회장(69)은 "개혁이라는 약은 쓰지만 그 결과는 달 것"이라며 이같이 강조했다. 코리아 소사이어티는 미국 사회에 한국의 경제.사회.문화 등을 소개하고 양국간 교류를 증진하기 위해 설립-운영되고 있는 단체. 그레그 전 대사는 지난 93년부터 5년째 이 단체의 회장을 맡아 전경련 지원으로 흑인 사회 등 미국내 소수민족과 한국간 관계를 증진하는 프로그램을 도입하는 등 미국내 "한국 바로 알리기"에 동분서주하고 있다. 현역 외교관 시절 못지 않게 바쁘게 지내고 있는 그레그 전 대사를 뉴욕 맨해튼 57번가 사무실에서 만나 보았다. [ 대담 = 이학영 뉴욕특파원 ]====================================================================== -한국의 외환 금융위기에 대해 미국정부가 지나치게 냉정하게 대하고 있다는 비판이 한국내에서 일고 있습니다. 정치-안보 분야의 현안이 제기됐을 때와는 달리 한국의 지경학적 비중이 경시되고 있는 것 아닙니까. 미국 재무부가 금융지원을 서둘러 달라는 한국 정부의 강력한 요청을 외면하고 있는데 대해 한국은 서운해하고 있습니다. 그레그 전 대사 =이번 문제를 국무부 등 외교-안보 부처가 아닌 재무부가 주도적으로 다루고 있는 데서 그런 느낌을 갖게 되는 것이겠지요. 하지만 한국이 미국에 있어서 정치-군사적으로는 물론 경제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나라라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만에 하나 한국이 채무불이행과 같은 불행한 지경에 빠지게 된다면 전 세계에 무시할 수 없는 파급효과를 미치게 될 것입니다. 미국 행정부는 이 점을 잘 알고 있고, 그에 따라 만반의 대비책을 갖고 사태를 주시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다만 한국도 이 기회에 정치 안보분야 뿐 아니라 경제분야 등에서도 다양하게 미국 정부 고위 인사들과 긴밀한 대화 채널을 구축해야 할 것입니다. -IMF(국제통화기금)가 한국에 지원을 공언하고 있는데도 이렇게 한국경제가 혼쭐나고 있는 이유를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그레그 전 대사 =많이들 지적하고 있는 얘깁니다만 "투명성"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예컨대 한국정부는 당초 1년내 만기가 돌아오는 단기 외채가 5백50여억달러라고 했지만 나중에는 그 규모가 1천억달러도 넘는 것으로 밝혀졌지요. 이런 식으로 한국 스스로 자신의 정보를 부정확하게 내놓고 있으니 뉴욕 등의 투자자들이 한국에 신뢰를 갖지 못하고 있고, 그 결과가 투자 회수로 나타나면서 사태를 악화시켰지요. 사실 한국의 경제시스템은 투명성에 문제가 많았습니다. 제가 주한 미국대사로 근무하던 시절 미국 기업인들이 "한국에서 사업하는 것은 마치 참호전(trenchwarfare)을 치르는 것 만큼이나 신경쓰이는 일이 많고 체력 소모도 크다"고 호소했던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지요. -IMF가 한국에 요구하고 있는 경제구조 개혁조치에 대해 "지나치다"라는 여론이 여전히 수그러들지 않고 있습니다. 이 점이 외국인 투자자들의 불안을 증폭시키고 있는데. 그레그 전 대사 =솔직히 IMF가 한국에 대해 내린 처방이 완벽한 것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저는 80년대 레이건 행정부시절 백악관에서 일했습니다만 그때 IMF의 오류를 지켜봤던 기억이 있습니다. 당시 남미국가들이 한창 금융위기를 겪고 있었는데 IMF가 적절치 못한 개혁 과제를 제시했다가 나중에 수정하느라 부산을 떨었지요. IMF는 금융지원 대상국가들에 양복(개혁과제)을 맞춰 주는 재단사와도 같습니다. 고객(지원 대상국가)의 신체적 특징을 면밀하게 파악해 양복을 만들어야지 그렇지 않으면 엉뚱한 결과를 빚기 십상입니다. -한국의 대기업들이 특히 IMF처방에 불안을 느끼고 있습니다. 한국이 지금과 같은 지경으로 몰리게 된 데 대해 대기업들의 책임을 묻는 목소리가 높은 것도 사실이지요. 그레그 전 대사 =흔히들 위기에는 기회가 공존하고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IMF가 대기업들의 구조조정을 요구하고 있는게 사실이긴 합니다만 이것은 대기업들을 해체하라는 것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체질을 튼튼하게 다지도록 이끄는 "약"을 준 것으로 봐야지요. -서방 전문가들은 은행과 대기업, 정부와 대기업간 "유착"과 정책금융이 온존돼온게 오늘의 위기를 키운 요인이라고 진단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레그 전 대사 =그 문제를 그렇게 간단하게 말할 수는 없습니다. 한국의 대기업들은 한국적인 특수 상황에서 육성됐고 발전해 왔습니다. 세계적 철강업체로 신화를 창조한 포항제철의 경우를 보세요. 60년대 박정희 대통령은 박태준씨에게 "땅과 돈, 기계를 다 대줄 테니까 세계적인 철강회사를 만들어내라"고 지시했고 결국 포철은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을 업고 발전할 수 있었습니다. 민간 기업들이 주도한 조선 자동차 산업도 정도의 차이가 있었을 뿐 정부의 지원으로 도약의 전기를 마련했습니다. 당시의 시대 상황에서는 불가피한 선택이었고 그 덕분으로 한국이 세계 11위의 경제대국으로 발돋움할 수 있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지요. 다만 글로벌화라는 시대의 대세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정부나 대기업들이 상황 변화에 걸맞는 변신을 서두르지 못한 것이 문제였습니다. -요즘 대기업들 사이에 자발적으로 구조조정노력이 모색되고 있는데. 그레그 전 대사 =아주 바람직한 양상입니다. 최근 쌍용그룹이 자동차회사를 대우그룹에 넘기기로 한 것이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는데 이건 아주 건설적인 모델이 될 것으로 봅니다. 이 조치는 대우와 쌍용을 모두 살리는 결과가 될 겁니다. 한국이 자동차 전자 석유화학 등에서 과잉 중복투자를 해왔다는 비판을 받고 있습니다만 이 문제는 결국 한국 업계 스스로의 노력으로 해소해야 할 과제입니다. 미국도 한 때는 자동차회사가 28개에까지 달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기업들간 부단한 경쟁을 통해 지금의 "빅 3"로 정리됐지요. -15일자 월 스트리트 저널이 사설에서 지적했습니다만 한국이 당면한 문제의 핵심은 "지도력 공백"(Leadership Vacuum)이라고들 하지요. 과연 새로운 대통령이 뽑힌다고 해서 이같은 문제가 일시에 해소될 수 있을까요. 그레그 전 대사 =리더십의 회복은 대외 신인도를 높이는 데 크게 기여할게 분명합니다. 대내적으로도 새로운 대통령 당선자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습니다. 미국이 대공황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던 1932년 대통령에 취임한 프랭클린루스벨트가 제일 먼저 한 말은 "우리가 두려워 해야 할 것은 두려움 그 자체 뿐이다. 그 밖에는 아무 것도 두려워할 것이 없다"는 것이었지요. 막연한 불안에 빠져 있던 미국 국민들에게 이 말은 큰 힘을 주었습니다. 이 말은 오늘의 한국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한국인들에게 필요한 것은 뚜렷한 비전을 동반한 강력한 리더십입니다 -내일이면 대통령 당선자가 결정됩니다. 전직 주한 대사로서 어떤 조언을 할 수 있겠는지요. 그레그 전 대사 =다섯가지를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첫째로 강력한 지도력을 발휘해야 한다는 것이고, 둘째는 여야를 가리지 말고 적재를 적소에 등용해야 할 것입니다. 셋째는 한 번 기용한 사람은 좀 오래 쓰라는 것이지요. 노태우 정부를 예로 들어보면 그가 재임한 5년동안 줄곧 행정부에 남아 있었던 사람은 외교안보수석비서관을 지낸 김종휘씨 한사람 뿐이었습니다. 그 때문인지 어쨌든 6공 정부는 북방분야 등 외교에 관한 한 많은 업적을 남기지 않았습니까. 사람을 자주 바꾸면 아무런 일도 할 수 없는 법이지요. 넷째는 세계화를 지속적으로 추진해야 할 것입니다. 진정한 세계화의 열매를 즐기기 위해서는 국제적 규범에 맞는 투명성 제고와 같은 "비용"을 회피하지 말아야 합니다. 다섯번째로는 이와 관련해서 정부의 모든 경제활동에 있어서 투명성을 높여야 한다는 점이지요. (한국경제신문 1997년 12월 17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