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치구의 중소기업 이야기] (37) '백수클럽'

세화정밀공업의 김용구사장(45)은 기자와 고등학교동창이다. 김사장은 학교다닐 때부터 침착한 성격에 공부도 잘했다. 서울대를 나와 경남기업에 입사한 그는 요르단등에서 근무하며 차근히 돈을모았다. 그돈으로 지난 90년 김포에 전자부품 공장을 차렸다. 그는 반도체관련부품을 만들면서 유망중소기업으로 선정되는등 빠르게 성장했다. 이때부터 당당한 풍모로 고급승용차를 타고 동창회에 나타나는 그를 보면 기가 눌렸다. 이처럼 잘나가던 김사장이 이달초 부도를 냈다. 열흘만에 그가 불쑥 신문사로 찾아왔다. 현관에서 기다리는 그를 보자 눈이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정말 행색이 말이 아니었다. 불과 한달만에 만났음에도 그의 풍모는 온데간데없고 머리카락은 눈을 맞은듯 하얗게 변해 있었다. 그와 함께 신문사옆에 있는 설렁탕집으로 갔다. 변한 건 머리카락 뿐이 아니었다. 그렇게 차분하던 그가 말을 심하게 더듬었다. 타고난 말더듬이 처럼 보였다. 더 심각한 건 손이 떨려 설렁탕국물을 제대로 입에 넣지 못했다. 국물이 입가로 줄줄 흘러내렸다. 사람이 며칠사이에 이렇게 변할 수 있다니. 에스컴의 정문해사장(49)도 지난 월요일 아무런 연락없이 신문사를 찾아왔다. 그는 독실한 기독교인. 그럼에도 그는 기자를 만나자마자 먼저 소주를 한잔하자고 말을 꺼냈다. 슬쩍봐도 그의 행색은 이미 정상이 아니었다. 머리카락을 군인처럼 빡빡깎은데다 안색이 파랗게 질려 있었다. 식당에 앉자마자 성경책부터 끄집어내더니 내일이면 돌아오는 9천만원짜리어음을 도저히 막을 수 없어 부도를 내게 됐다고 한숨을 토했다. 이어 "부도가 나면 자살을 할 수 밖에 없다"고 선언했다. 기독교에서 자살은 죄악이라는데 그 문귀가 성경 어디에 나오는지 찾을 수가 없다고 주루룩 눈물을 흘렸다. 몇년전 자동차부품회사 사장이 신문사앞으로 찾아와 며칠뒤에 자살하겠다고얘기했을 때 농담으로 받아들였다가 무척이나 후회한 기자로선 자살만은 하지마라고 거듭 달랠 수 밖에 없었다. 부도-. 요즘 하루에도 30~50건씩 일어나는 사건. 강건너 등불처럼 멀리서 바라보는 사람들로선 이것이 대단치 않은 사건일는지 모른다. 그러나 직접 당하는 사람들은 상상외로 심한 고통에 빠진다. 이들을 만나보면 며칠사이에 몸이 심하게 상해있다. 눈이 충혈돼 시력을 거의 잃어가거나 몸무게가 10kg이상 빠지는 경우는 흔하다. 구토증에 걸려 물외엔 아무것도 못먹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술을 너무많이 마셔 손바닥이 갈라져버렸다는 사람도 봤다. 머리에 지름 3cm 정도의 원형탈모증이 두세개씩 나타나는 경우도 자주 있는 일. 보령금속의 황인규사장(51)은 부도를 낸 뒤 잠을 자면 벌떼가 온몸에 달라붙는 꿈을 매일 꾸는 바람에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그래서 밤마다 혼자 관악산을 등산했다는 것. 이때부터 그는 밤중에 등산하는 사람이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들중엔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갑자기 실직을 했거나 부도를 낸 사람들. 황사장은 이들 밤등산 애호가들과 모임을 만들었다. 모임의 이름은 백수클럽. "백수"란 보통 빈털털이가 된 빈손 즉 실업자을 일컫는 속어. 그러나 이들이 백수클럽을 만든 건 비록 백수가 됐더라도 몸을 상하게 하지말고 백수를 해 재기하자는 뜻에서라고. 동창인 김용구사장에게 백수클럽에 가입해 몸을 아끼라고 권유를 했다가 오히려 심한 핀잔만 들었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12월 19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