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의 정부' 첫 내각] 신임 이규성 재경장관 :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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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성 신임 재정경제부장관은 김용환 자민련 부총재가 아끼던 재무부 후배중의 한사람이다. 그러나 과거 중요한 보직때마다 그리 명예롭게 물러나지 못했다. 지난 81년 재무부차관으로 입성한 강경식 전부총리는 김재익 경제수석 후원아래 금융실명제 실시를 강력히 주장했다. 당시 재무부1차관보로 있던 이장관은 금융시장에 미칠 혼란과 충격을 우려,반대했다. 이로인해 고시동기인 강전부총리의 미움을 산 나머지 전매청장으로 좌천됐다. 경제기획원과 재무부간의 전쟁에서 희생양이 되었다는 평가가 일반적인 해석이다. 이장관은 83년 수석차관급인 국무총리 행정조정실장으로 화려하게 컴백,무려 5년간 국무총리 5명을 모셨다. 이장관이 친정인 재무부를 떠난지 6년만에 장관으로 금의환향한 데에는 이현재 전총리및 사공일 전재무장관의 추천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장관이 재무부에 있던 88년말에서 90년초는 극심한 노사분규속에 급격한 외자유입으로 통화관리에 어려움을 겪던 시기였다. 특히 주식시장은 과도한 공급물량및 투기붐 냉각으로 연일 하락세를 연출했다. 이에따라 금융시장마저 극심하게 불안해지자 이장관은 89년12월12일 한국은행의 발권력을 동원해서라도 투신사 등 기관투자가들이 주식매수에 나서도록 하겠다고 발표했다. 이장관측은 주식시장 안정을 위한 공포성 조치로 마련했으나 실무자들이 잘못 이해한 나머지 투신사가 한은의 돈을 빌려 주식매입에 나서도록 독려했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로인해 투신사의 부실화, 증시의 장기침체, 부동산투기거래가 나타난데 책임을 지고 이장관은 90년초 물러나게 된다. 이장관은 89년 경상수지흑자가 지속되면서 통화증발압력이 가중되자 외환유출을 위해 기업의 해외투자를 촉진하고 해외부동산 투자범위도 확대하는 결정을 내렸다. 또 지난 88년 8.10 부동산 대책에 따라 2년간의 준비끝에 같은해 12월 토지공개념을 구체화한 택지소유상한에 관한 법률및 개발이익환수법, 토지초과이득세 등 3개 법령을 제정했다. 이와함께 한국은행과 재무부간의 1차 한은법 파문을 종전시켰다. 지난 75년 금융제도심의관으로 재직하면서 재산형성저축제도를 도입한 주역이기도 하다. 인사철학은 "50%는 연공서열, 50%는 발탁". 부하직원에 대한 각별한 애정으로 재무부장관시절 고참사무관 28명을 한꺼번에 서기관으로 발령을 내 화제가 되기도 했다. (한국경제신문 1998년 3월 4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