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치구의 중소기업 이야기] (48) '모범답안'

대전 대덕에 있는 진합정공의 공장입구엔 커다란 실타래같은 강철선 뭉치들이 쌓여 있다. 이들 타래는 공장안으로 들어가면서 자동화공정을 거쳐 토막으로 썰어진다. 이어 무인공정을 한번 더 거치면 토막은 몇초안에 정교한 볼트로 바뀐다. 이 볼트는 자동차및 항공기용 부품. 이 회사 볼트의 강도는 세계 최고수준. 그래서 이 회사는 중소기업진흥공단이 선정한 국내 첫 자동생산 모범공장이됐다. 진합은 자동화뿐 아니라 리팩토리 100PPM 업무전산화등 혁신운동에서도 앞서 있다. 이 회사의 이영섭(57)사장은 대전지역에서 건실하기로 이름난 기업인이다. 이런 모범적인 회사는 요즘 어떨까. 국제통화기금(IMF)시대에도 거뜬할까. 이사장은 한마디로 "그렇지 않다"고 답한다. 이 회사도 IMF대처방안을 세웠다. 이 회사의 방안이라면 모범적일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그 ''모범답안''을 커닝해봤다. 진합정공의 지난해 매출은 2백1억원으로 전형적인 중소기업수준이다. 이사장이 예상한 올해 매출은 많아야 1백20억원정도. 지난해보다 적어도 40%가량 줄어든다는 얘기다. 그는 기업들 대부분이 5년전정도의 매출에 그칠 것으로 본다. 이사장은 원자재 가격이 30~40% 오를 것으로 계산했다. 원자재값을 거의 현금으로 치뤄야 할 판이어서 부담은 더욱 큰 수준. 원자재 가격상승등으로 지난해보다 9억원정도가 더 들 것으로 추정했다. 판매대금으로 받은 어음을 할인할 때 연 20%선의 이자를 물어야 하고 대출금리도 19%는 물어야 할 것으로 봤다. 금리부담에 환차손까지 합쳐 올해 11억원정도 추가손실이 날 것으로 셈했다. 결국 이사장이 계산한 올해 예상손실은 20억원. 이런 결손을 예상하면서 가만히 앉아 있을 수는 없지 않은가. 이사장은 관계 직원들과 함께 2주일간 피를 말리는 고민을 한 끝에 구조조정안을 만들었다. 일단 매출목표를 지난해보다 30% 줄였다. 특히 내수판매목표는 지난해의 절반으로 낮추고 나머지는 수출에서 채우기로 했다. 이제 결손을 줄이기 위한 대책이 필요했다. 가장 손쉬운 방법으로 판매가격인상을 택했다. 부품 판매가격을 5%정도 올리기로 한 것이다. 대신 중간상을 거치지 않고 직접 판매에 나서기로 했다. 여기서 약 6억원을 절감할 수 있을 것으로 전망했다. 이어 볼트류와 철선등 재고분을 모두 없애 약 5억원정도를 확보할 수 있었다. 이같은 방안에도 불구,아직 9억원이란 결손을 해결할 방도가 없었다. 이사장은 눈물을 머금고 노사협의회와 협상에 들어갔다. 나머지 손실을 메울 방법이라곤 인력절감밖에 남지 않았기 때문. 며칠간의 협의끝에 과장급 이상에 대해선 상여금전액을 삭감키로 했다. 대리급이하 사원은 3백50%를 깎기로 했다. 자연감소하는 인원은 충당하지 않는 방안도 만들었다. 이정도면 큰 손실은 입지 않을 것으로 예상했다. 그래도 유동성이 불안했다. 때문에 현금화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팔았다. 골프회원권과 콘도회원권을 팔았고 사원들을 위해 분양받아놓았던 아파트도 처분했다. 그동안 점심식사는 식당에서 무료로 줬으나 도시락을 싸오게 했다. 통근버스운행도 중단했다. 모범기업의 대응도 어쩔 수 없이 "볼트"를 조이는 방식이 되고 말았다. 이 볼트조이기 답안이 얼마나 모범적인 것일지는 두고 볼 일이다. (한국경제신문 1998년 3월 20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