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11일자) 쌀회담 재판 안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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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중국 베이징(북경)에서 열리는 남북한 차관급 회담은 3년9개월만에 이뤄지는 당국자간 만남이라는 점 외에도 새정부의 화해노선에 북한이 보여준 첫번째 긍정적 반응이라는 점에서 자못 의미가 크다. 쌀 15만t을 받고도 거부했던 당국자간 회담이 새정부 들어서자마자 북한의 전격적인 제의로 이렇게 빨리 성사된 것은 뜻밖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아쉬울 때만 이런 저런 미끼를 던져 단물만 빼먹고 돌아서는 북한의 과거 수법을 모르는바 아니지만 우리가 이번 회담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것은 이를 계기로 오랫동안 단절돼온 남북한의 대화통로가 복원돼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동안 남북관계는 우리의 경수로 및 식량지원 등 일방적인 대북지원에도 불구하고 전혀 진전을 보지 못한채 4자회담의 틀 안에서 명맥을 이어왔다. 그러나 남북대화가 재개되면 상황은 바뀌게 된다. 4자회담 안에서의 우리의 입지가 넓어짐은 물론 미국을 통해 북한의 정황을 파악하려고 애쓰던 과거 우리정부의 딱한 모습을 더이상 보지 않게 될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이번 회담이 처음부터 만족할만한 성과를 거두리라고 기대하긴 어렵다. "비료문제 등 상호관심사에 관해 논의하자"는 북한측의 제의에서도 읽을수 있듯이 북한은 남한의 대북 비료지원 문제를 주의제로 하고 상호관심사는 뒷전으로 돌려놓겠다는 속셈이 분명하다. 그런가 하면 우리측은 새정부가 대북정책의 최우선 과제로 삼고 있는 이산가족 상봉을 실현하기 위한 적십자회담 정례화와 특사교환 등의 남북관계 개선을 비료제공과 연계시킨다는 전략이다. 언뜻보면 입장차가 커 합의가 어려울듯도 싶지만 북한의 급박한 식량사정으로 볼 때 적당한 선에서 타협이 이루어질 가능성이 크다. 문제는 우리측이 얼마나 냉정을 유지하느냐 하는 것이다. 괜히 한건주의에 들떠 가시적 성과에만 집착한다면 도와주고 뺨맞는 격이 됐던 95년 쌀회담의 재판이 되지말라는 보장이 없다. 정부는 북한을 설득해 남북 차관급 회담을 2차회담부터는 판문점으로 끌고 들어오는 것이 바람직하다. 굳이 당국자간 회담을 제3국에서 갖자고 우기는 북한의 저의를 모르는체 넘어가 준다면 매사가 그런 식이 되기 쉽다. 판문점은 북한이 일방적으로 무용화를 선언한 휴전체제가 현실적으로 엄연히 유효함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소라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쌀회담 때도 그랬듯이 북한의 "선지원, 후대화"주장으로 회담이 난항을 겪는다 해도 우리정부로서는 서두를게 없다. 냉전체제가 사라진 오늘날 남북문제의 당사자는 바로 남과 북이며 당사자간의 대화 없이는 어떤 문제도 해결될 수 없다는 것을 멀지않아 북한도 깨닫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급한 쪽은 북한이라는 것을 우리측 대표단은 회담내내 잊지 말기 바란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4월 11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