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칼럼] 아시아 경제발전모형의 허구..오관치 <연구소장>

오관치 아시아적 경제발전 모형의 근저에는 시장기구에 대한 강한 불신이 놓여있다. 시장가격기구에만 의존해서는 효율적인 자원배분이 이루어지지 못하기 때문에 정부가 직접 개입해야 한다는 것이 일부 아시아 국가들의 주장이다. 이들은 시장기구가 불완전해 자원배분에 필요한 완전한 정보를 기업들에 제공하지 못하기 때문에 국가경제의 입장에서 유망한 산업부문에 바람직한 수준의 투자가 이루어지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정부는 미래의 유망산업을 선정하고, 여기에 보다 많은 자원이 배분되도록 재정에서 직접 투자하거나 세제 및 금융상의 우대조치, 보조금 지급, 행정지원, 설득 등을 통해 기업의 투자를 촉진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논리에 따라 일본 등 대부분의 아시아 국가들은 시장기구에 깊숙이 개입하여 국가경제의 관점에서 중요산업을 선정하고, 이를 육성하기 위한 다양한 산업지원 조치를 취해 왔다. 일본은 이러한 산업정책에 의해 세계 제2의 경제대국이 되었고, 성장전망은누구도 의심할 수 없을 정도로 밝은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일본식 경제발전 모형은 고도성장을 보장하는 확고한 경제정책 도식으로 인정되었고, 아시아의 후발 공업국들은 일본을 모방하기에 급급하였다. 일본의 산업정책을 주도했던 통산성은 신화적 존재가 되었고, 외국의 수많은 기업들은 일본식 경영을 받아들이기에 바빴다. 그런데 지난해 태국의 금융위기를 시발로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한국 등 일본식 경제발전 모형을 따른 아시아 신생공업국들이 연달아 심각한 경제 침체에 직면하게 되었고, 일본 역시 해외 부실채권 누적과 국내수요 감퇴로 유사한 금융불안과 경기침체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에 반해 정부가 산업지원 등 시장 개입을 최소한으로 자제해온 미국은 산업이 자율적인 산업구조조정을 거쳐 강력한 국제경쟁력을 갖추게 됨에 따라 장기간의 호황을 누리고 있다. 시장기구를 불신한 일본의 경제와, 시장기구에 의존한 미국의 경제가 보여준 상반된 성과는 아시아적 경제발전 모형의 효용성에 의문을 제기하게 만들었다. 즉 정부가 시장보다 더 완전한 정보를 획득할 수 있다는 주장에 회의를 가지게 된 것이다. 정부의 산업정책 또는 자원배분정책은 소수의 관료에 의해 결정되는데,이들이 정부 부서내의 책상 위에서 얻는 정보가 시장에 지속적으로 참여해온 기업 및 소비자가 얻는 정보보다 더 완전할 수 있다는 것을 믿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정부 관료가 획득한 정보가 시장기구보다 얼마나 열등한가는 과거 우리의 경험에서도 쉽사리 발견할 수 있다. 우리 정부가 60~70년대에 조세감면을 통해 육성하고자 중요산업이라고 지정한 범주에는 오늘날 첨단기술산업이라고 불리는 정보과학 생명공학 우주과학 환경공학 등을 이용하는 산업이 모두 누락되어 있다. 그러나 시장기구는 이들 첨단산업에 관한 신호를 꾸준히 보내줘 지각있는 기업가들은 이를 곧 포착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자원배분에 필요한 완전한 정보를 시장기구는 제공해주지 못한다는 "시장 실패"에 대한 가설은 이제 폐기하지 않으면 안된다. 시장기구는 어떤 유능한 정부관료보다 훨씬 완전한 정보를 제공해 주고 있으며, 이러한 시장 정보에 의존하지 않는 자원배분 정책 또는 산업정책은 반드시 국가자원 낭비와 국제경쟁력 상실을 초래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정부의 시장 개입은 지금으로부터 2백22년전에 애덤 스미스가 그의 "국부론"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상품의 불가분성(국방 치안 등), 외부효과(환경보전 등), 대량생산에 따른 생산단가 하락, 과도한 위험(핵 에너지개발 등) 등으로 인해 시장기구가 효율적인 자원 배분에 실패하는 경우에 국한해야 한다. 그 외에는 정부의 역할이 시장의 경쟁촉진에 국한돼야 한다. 공정하고 자유로운 경쟁이 이루어지도록 법규를 제정하고, 이들 법규내에서기업 및 소비자가 공정하고 자유로운 경쟁을 하도록 감시하는 것이 정부의 경제역할이 돼야 할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현 정부가 산업구조조정을 시장가격 기구에 맡기겠다고 천명한 점은 매우 현명한 결정이라고 생각하며 이를 견지해야 할 것이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4월 15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