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바티칸 근위대

1291년 스위스를 지배하던 합스부르크가의 루돌프1세가 사망하자 우리,슈비츠, 운터발덴 등 3주는 연합해 독립운동을 시작했다. 실러의 희곡으로 유명한 "빌헬름 텔"의 이야기는 우리지방의 알트도르프에서 합스부르크의 관리인 겟슬러의 폭정에 항거한 스위스인에 관한 전설적 이야기다. 스위스민병의 장창대는 1315년 모르가르텐에서 오스트리아 기병대를 격파한데 이어 1386년 젬파하, 1388년 네펠스에서 각각 오스트리아군에 대승했다. 스위스 민병은 또 프랑스의 중앙집권체제를 확립한 루이11세의 용병으로 유럽 전역에 이름을 떨쳤다. 교회국가의 재건을 꿈꾼 교황 율리우스2세(1443~1513)가 즉위 3년만인 1506년 스위스민병들로 근위대를 창설한 것도 그들의 이같은 충성심과 용맹성을 높이 샀기 때문이다. 1527년 찰스6세가 로마교황청을 침략했을 때 근위대원 1백47명 전원이 죽음으로 교황 클레멘스7세를 지킨 일은 유명하다. 교황의 경호와 바티칸의 치안 책임자인 근위대장 알루아 에스테르만이 임명 당일 피살돼 세계를 떠들썩하게 하고 있다. 범인은 부하인 세드리치 토네이로 알려졌다. 살해이유는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인사불만과 꾸중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이들 근위대는 명예와 충성을 절대신조로 삼고 투철한 사명감을 지녔을 뿐만 아니라 상하복종관계도 명확해 지금까지 이같은 일은 한번도 없었다고 한다. 고대 그리스에서 생겨난 용병은 중세 유럽의 국가 운명을 좌우할 정도로 늘어나지만 프랑스혁명 이후 징병제도에 의한 시민군이 생기자 자취를 감춘다. 용병은 성격상 급료나 다른 계약조건에 의해 수시로 소속을 바꾸고, 또 외국인인 만큼 자국 군인들과의 공동생활이나 협동작전을 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스위스용병은 다른 용병들과 달리 용감하고 계약조건을 성실히 이행한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아왔다. 바티칸 근위대가 5백년 가까이 스위스민병으로만 구성돼온 것도 바로 이런연유에서다. 살해동기가 무엇이든 토네이의 행동은 엄청난 하극상이다. 에스테르만의 죽음이 근위대원의 조건을 "스위스 출신의 키 1백74cm이상30세미만 가톨릭신자"로 제한해온 교황청의 전통에 어떤 변화를 가져올지궁금하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5월 7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