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칼럼] 스승과 훈장 .. 최근덕 <성균관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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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의 날에 스승을 생각한다. 서너살 어린 시절에는 할아버님이 스승이었고 학교에 입학해 초.중.고등 대학에 다닐 적에는 그곳 선생님이 스승이었다. 그러고 보니 학교에서 가르침을 받은 스승은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많다. 눈을 감고 조용히 기억을 더듬어도 생각나는 스승은 그리 많지 않다. 모습만 기억될 뿐 성명삼자가 생각나지 않는 분이 계시는가 하면 한두마디 말씀은 아직도 귓가에 생생한데 어느 분이었는지 통 알 수가 없는 경우도 있다. 그중에도 당시의 언어 행동이 생생하게 기억되면서 그리움이 왈칵 솟구치는 스승도 계신다. 지금 어디서 뭘하고 계실까. 작고하셨는지도 모른다. 기억속에 남아있는 대부분의 스승은 작고하셨을 것이다. 연세로 봐 대개 여든을 넘으셨을 터이니 생존해 계신다 하더라도 까마득한 옛날의 제자를 기억이나 하시겠는가. 그렇지만 뵙고 싶다. 한번 찾아 뵙고 소년 시절로 돌아가 눈치 슬슬 봐 가며 객쩍은 질문도 하고 좀은 용기를 내서 선생님 옛날 별명이 뭣이었다고 알려 드리고도 싶다. 스승의 날에 생각해 보는 스승. 이날 하루, 아니 얼핏 한 순간의 회상에 떠올려지는 스승. 참으로 무심하고 버르장머리없는 망나니 제자를 둔 스승일 수밖에 없다. 예절 못 닦는 제자임에는 틀림없지만 어쩌다 생각이 나면 그리움으로 가슴이 벅차 오르는 수도 있고 죄스러워서 마음이 아파오는 수도 있으니 미상불 못난 제자라 해야 옳을 것 같다. 그러고 보니 어떤 분이 스승인가 하는 의문이 생겨난다. 학교 교육을 받은 사람이면 누구나 수많은 선생님에게서 가르침을 받게 되고 학교뿐만 아니라 사회생활에서도 선생은 있게 마련이다. 이들이 모두 스승일 것인가. 너무 퇴색되지 않겠는가. 선비 기르는 것으로 교육의 목표를 삼았던 조선시대에는 스승에 대한 기준이 엄격했다. 글자나 지식을 전수하는 선생은 스승이 아니었다. 그저 훈장이다. 도덕 조행에서 모범이 되고 인생의 대경대법을 깨우쳐주신 분이 바로 스승이었다. 스승은 사로 표현하기도 했지만 선생이라 일컬었다. "한 가문에 정승 세사람 배출하는 것보다 선생 한분 나오는 것이 더 영광이다"하는 말도 따지고 보면 도덕 경륜으로 세상 사람들의 우러름을 받는 스승을 가장 존중했던 사회 통념을 반영하고 있다. 오늘날 흔히 "스승은 없다"는 한탄을 듣는다. 지식보다는 도덕 조행에 더 비중을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치열한 입시경쟁, 학교의 대형화, 인성교육의 실종 등으로 학교교육이 기계적인 지식 전달에 시종될 수밖에 없고 거기에다 핵가족화로 가정교육조차 희미해지고 있으니 스승이 자리할 곳이 있을 턱이 없다. 조선 시대의 대표적 스승인 퇴계 이황 선생은 "학교의 교사와 생도에게 주는 글(유사학사생문)"에서 "교사는 엄하고 생도는 공경(사엄생경)해서 각각 그 도리를 다해야 한다"고 했다. 그 도리란 교사는 "스승의 도리"이고 생도는 "제자로서의 도리"를 말하고 있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엄하다는 것은 무섭게 대하라는 뜻이 아니고 공경한다는 것은 비굴하게 대하라는 뜻이 아니다. 서로 예의를 지키라는 뜻일 뿐이라고 퇴계선생은 강조한다. 예의는 또 무엇인가. 옷차림을 깔끔하게 하는 것, 음식을 절도있게 먹는 것, 서로 대하기를 깍듯이 하는 것, 그런 것일 뿐이다. 퇴계선생은 임종을 앞두고 제자들과 마지막 작별을 하는 자리에서 말했다. "자네들과 하루 종일 강론하는 것이 또한 쉬운 일이 아니었네" 그는 몸으로 실천해 보이는 스승이었다. 깔끔하고 검소하며 부지런하고 돈독한 스승이었기에 제자들에게도 그렇게 따라 하도록 유도했다. 아무리 나이 어린 제자일지라도 함부로 말하지 않았고 엉뚱한 질문을 하거나 어설픈 주장을 펴도 주의깊게 끝까지 듣고서 도리를 들어 순순히 타일렀다. 제자 김모가 부유하게 살아 사치에 흐르는 것을 경계해 마지 않았고 어느 때는 노새를 선물하자 부모가 생존해 있는 사람에게서 그런 것을 받을 수 없다고 돌려보냈다. 오늘의 스승, 오늘의 제자를 모두 한번쯤 되돌아 볼 일이 아닐 수 없다. 초등학교 교사로 출발해서 중등학교 교장까지 지내고 정년 퇴임한 어느 선배의 말이 생각난다. "학년이 올라갈수록, 학교가 올라갈수록 선생과 아이들 거리가 멀어지고,세월이 갈수록, 선생도 아이들도 제각각이 되어가더라구요"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5월 15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