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한글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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샌즈(W Sands)는 1900년초에 고종의 고문관으로 임명돼 4년동안 궁중에 거처하면서 황제를 도왔던 미국인 외교관이다. 그가 쓴 "비외교적 회고록"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실려 있어 관심을 끈다. 황태자비가 자주 내관을 숙소에 보내 책을 빌려달라는 요청을 해와 중국어나 일본어로 번역된 서양의 역사 과학 지리 철학 예술서적들과 유럽소설들까지 빌려주었다는 대목이다. 일단 책을 보내면 얼마뒤 사람을 다시 보내 책에 대한 논평과 질문을 해왔는데 그것이 보통 예리한 것이 아니었다고 적었다. 여기서 샌즈가 말하는 황태자비는 조선의 마지막왕 순종의 순명효황후 민씨이다. 민씨가 외국책들을 혼자 읽어서 이해할 수 있었을리는 없었겠지만 어떻든 당시 궁궐내 여인들의 분위기가 옛날과는 달랐고 그들의 외국문물에 대한 지식욕도 상당했다는 사실을 샌즈는 생생하게 증언해주고 있다.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국어학자료팀 이광호 박사가 15일 "조선왕조실록"가운데 현종에서 철종에 이르는 8대의 중요기사를 뽑아 한글로 번역한뒤 편년체로 엮은 한글 필사본 "실록초본"을 공개해 화제가 되고 있다. 이 박사는 이 "실록초본"이 왕실의 여성과 아동을 위해 1908년께 만든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한편 순명효황후 민씨에게 왕실역사를 가르칠 목적으로 만든 것일 수도 있다는 견해를 밝히기도 했다. 한국사연구의 기본사료인 "조선왕조실록"은 지난해 10월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우리의 자랑거리다. 국역에만도 26년이나 걸려 93년 4백47책으로 완간됐다. 북한에서는 그보다 2년 앞서 4백책으로 번역돼 나왔다. 또 국내에서는 이미 서울시스템이 지난해 CD-ROM으로 제작해내 간편하게 이용되고 있다. 지금 한글 "실록초본"이 발굴됐다고 해서 흥분할 일은 못된다. 그러나 나라가 기울어가는 국난의 시기에도 역사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한문에 어두운 여성이나 아동에게 가르치려했던 살아있는 "왕실의 정신"이 밝혀진 셈이다. 이런 자료가 왜 학자의 눈에 띄지 않고 아직까지 정문연 서고에 처박혀 있어야 했는지 곰곰이 생각해도 모를 일이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5월 16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