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네시아 사태] '조건부 하야'..인도네시아 국민 회의적

수하르토 인도네시아 대통령이 19일 사임의사와 앞으로의 정치일정을 밝힘에 따라 파국으로 치닫던 인도네시아 사태는 일단 한 숨을 돌리게 될 것으로 보인다. 이날 수하르토가 약속한 내용은 크게 두가지다. 하나는 사회각계각층이 참여하는 개혁위원회를 구성해 선거법과 반독점법,반부패법등을 정비하겠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자신이 출마하지 않은 가운데" 조기선거를 실시, 차기 대통령을 선출토록 하겠다는 것이다. 이는 국민들이 요구해온 "즉각 사임"에는 못미치지만 정권교체와 정치개혁 요구를 어느정도 수용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물러나긴 하되 다소의 시간을 갖고 명예롭게 퇴진하겠다는 얘기다. 이같은 평가는 시장에도 즉각 반영돼 수하르토의 기자회견 직후 아시아 각국 증시가 일제히 상승세로 돌아서기도 했다. 하지만 이로써 인도네시아 사태에 돌파구가 마련됐다고 판단하기는 아직 이르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수하르토가 과연 자신의 약속을 충실히 이행할 지가 여전히 미덥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날 인도네시아 국민들은 수하르토의 발표내용을 환영하면서도 그가 내건 약속의 이행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반응이 적지 않았다. 또 인도네시아의 정치분석가들 사이에서는 "수하르토가 시간을 벌기 위해 전략적으로 한발 물러선 것일 뿐"이라는 견해도 나오고 있다. 대학생들도 이날 기자회견에도 불구하고 20일로 예정돼 있던 시위를 당초 계획대로 강행하겠다는 뜻을 밝히고 나섰다. 특히 수하르토가 총선의 시기를 명확히 못박지 않고 "가능한 빨리"라고만 언급한 점이 의심을 받고 있다. 일부에서는 인도네시아의 선거제도상 다음 대통령이 선출되려면 3-6개월이 소요될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고 있다. 또 "다음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지 않겠다"는 약속도 신뢰를 얻지 못하고 있다. 이 약속은 수하르토가 지난 10여년간 선거때마다 애용해온 단골 메뉴여서다. 게다가 수하르토 대통령은 정권교체까지의 기간동안 자신이 현직을 유지해야 하는 이유로 "당장 물러날 경우 혼란이 심화될 것"이라고 했는데 이는 장기독재자 특유의 발상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수하르토가 학생과 시민들의 사임요구에 완전 백기를 들지 않고 조건부타협안을 내놓은 것은 군부가 변함없이 자신에게 충성과 지지를 보내고 있다는 자신감에서 비롯됐다고 할 수 있다. 지난 32년간 권력을 유지해온 노회한 정치인인 수하르토 대통령이 우선 위기를 넘기고 사태가 호전되면 정국 재장악을 시도할지도 모른다는 시나리오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인도네시아 사태의 향방은 20일로 예정된 학생 등 반정부 세력의 대규모 시위상황과 함께 이번 중대 발표에 대한 여론이 어떻게 돌아가는 지를 좀더 두고 봐야 윤곽이 가려질 것으로 보인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5월 20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