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입삼 회고록 '시장경제와 기업가 정신'] (9) '배움의 길'

나는 요즘도 신문에 흥미로운 책이 소개되면 꼭 사서 읽는다. 책읽기를 좋아하기도 하지만 어린 시절 가난 때문에 학업을 제 때 못한 설움이 남아선지도 모른다. 입학시험을 치르던 때나 미국, 영국 유학시절을 떠올리면 지금도 가슴이 뛴다. 종성보통학교 6학년 때 나는 담임선생의 권유를 따라 인문계인 경성고등보통학교에 응시했다. 우리학교 출신으론 나와 재수생 한명 등 2명만이 합격했다. 그 전해에는 단 한명도 입학하지 못했었다. 4월초 치러진 입학식에서 나는 신입생 대표로 나가 모자에 붙이는 모표를 받았다. 아버지는 매우 기뻐하셨다. 1등은 신입생 선서를 했다. 나는 2등이었다. 실업학교를 포기하고 고등보통학교에 가서 나는 많은 것을 얻었다. 우선 거짓투성이인 일본 역사만 배우다가 동양사 서양사 강의를 듣고선 시야가 많이 넓어졌다. 머리도 맑아졌다. 사마천의 사기를 통해 수양산 고사리만 먹고 죽어간 백이숙제 이야기를 읽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 등 르네상스의 천재들에 매료된 것도 그때다. 경성고보 3학년 가을 아버지는 위궤양으로 세상을 뜨셨다. 나에게 어떤 기대를 거셨는지 형에게 나를 계속 공부시키라는 유언을 남기셨다. 이 유언은 가정 형편상 도저히 이룰 수 없는 것이었다. 동기생들은 4학년때 일본으로 수학여행을 갔다. 90명 중 나만이 집안에 일이 있다는 핑계로 빠졌다. 여비가 한푼도 없었던 것이다. 상급학교 진학은 꿈도 못꿀 지경이었다. 42년 겨울 실의에 빠진 나는 졸업생 대표로 답사를 읽는 것도 사양하고 졸업식장에 가지 않았다. 그후에도 내게 어려운 고비가 많았으나 이때만큼 실의에 빠지고 의기소침했던 때는 없었던 것 같다. 학업의 꿈을 접어둔채 살았다. 세월은 빠르게 지나갔다. 45년 광복을 맞았다. 50년엔 6.25가 터졌다. 전쟁 중 나는 UN군사령부 정보교육국과 인연을 맺게 돼 방송과 교육프로그램을 작성하는 일을 하게 됐다. 이 과정에서 총알이 빗발치는 일선에도 호위병사들과 함께 넘나들었다. 51년 1월말께로 기억된다. 중부전선에 갔다가 서울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오후 4시가 넘으니 벌써 해는 서산에 기울기 시작했다. 경기도 파주를 막 벗어날 때 찬바람은 더욱 거세게 불었다. 지프차에서 본 바깥 풍경은 논과 들이 눈에 덮여 황량하기 짝이 없었다. 그런데 대로변 논두렁에 사람기척이 있었다. 속도를 늦추고 자세히 보니 할머니가 대여섯살 되는 아이를 미군 담요로 감싼 채 웅크리고 있었다. 아이 손을 꼭 잡고 기도를 하고 있었다. 나는 방금 일선에서 포성을 듣고 오는 길인데 이 노인은 아들을 일선에 보낸 모양이었다. 그때 나는 어린시절 정화수로 가족의 평안을 빌던 어머니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리고 속으로 생각했다. "하나님은 이 찬바람이 부는 허허벌판에서 무릎꿇은 노파의 기도나 따뜻한 교회에서 드리는 신자들의 기도나 똑 같이 헤아려주실 것이다. 그러나 이왕이면 내 동포들이 안락한 곳에서 기도하면 좋지 않은가. 사람들이 떨지 않고 기도할 수 있도록 잘사는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 나는 지난 50년을 그 때의 다짐을 간직하고 살아왔다. UN군 교육방송 프로그램을 짜면서 같이 일을 한 미군 병사가 있었다. 도널드 크리스티 하사였는데 미국 중북부 미네소타대학에서 신문학을 전공한 덕에 일선에 안간 친구였다. 1년 정도 같이 근무했을 때 이 친구가 갑자기 미국에서 공부할 의향이 없느냐고 물었다. 나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던 제안이었다. 꿈을 잃지 않고 살았더니 길이 열린 것이다. 졸업식장에 가지 않고 울음을 삼킨지 꼭 12년 만이었다. 결국 나는 크리스티 하사와 그의 아버지로부터 재정보증을 받아 미국 유학을 떠나게 됐다. 54년 8월20일 서울 여의도 간이비행장에서 쌍발비행기에 올라탔다. 일본을 거쳐 미국에 갔다. 그리고 크리스티하사의 모교인 미네소타대학 정치학부에 입학했다. 이 대학은 당시 학생수 4만명이 넘는, 적어도 학생수로는 미국 5대 대학의 하나였다. 미네소타주는 스칸디나비아 사람들이 19세기 초엽부터 대기근을 피해 대량 이민와서 위스콘신과 더불어 건설한 주다. 50년 후르시초프 당시 소련서기장은 미네소타대학을 방문해 "공원같다"고 극찬을 했었다. 2차 대전 직후 영국 처칠 수상도 미네소타대학 메디컬센터를 방문하고 그 수준과 시설을 부러워했었다. 심리학 신문학 정치 경제 철학 물리 농학 등 분야에선 세계 으뜸을 다투는 학교였다. 특히 내가 재학했던 54~57년엔 서울대와 자매결연을 맺어 총장 이하 강사까지 미국 원조 장학생으로 이 대학에 유학했었다. 필자가 지금 울산대 총장인 구본호 박사와 함께 조직한 한인학생회 회원이 한 때 1백50명이 넘었을 정도였다. 나는 닥치는 대로 강의에 참석했다. 책도 무척 많이 읽었다. 돈이 없어 공부못한 설움을 털어낼 듯이 열심히 공부했다. 그러나 몇달 후 심리학 중간시험 성적표를 받아들곤 눈앞이 캄캄했다. 학점이 "D"였다. 영어가 짧아 강의내용을 거의 알아들을 수 없었던 것이다. 포기하고 싶었다. 수강신청을 철회할까하는 생각도 했었다. 그러나 어떻게 온 유학인가. 오기로 밀어붙였다. 학기말에 겨우 "C"로 올려놓을 수 있었다. 지금도 그때 심리학 교과서가 내방 서가에 꽂혀있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5월 25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