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20일자) 소걸음으로 꾸준하게

정주영 현대명예회장의 방북을 계기로 판문점이 "대결의 장"에서 "교류와 협력의 장"으로 바뀌고 있음은 주목할만한 변화라고 하겠다. 정회장이 소떼와 함께 판문점을 넘기 바로 전날 북한측이 오는 8월15일 광복절 "통일대축전"을 판문점에서 개최하자고 제의해온데 대해 우리정부는 이를 수용키로 하고 축전 준비를 위한 남북 당국자간의 회담을 판문점에서 열 것을 제의할 방침이라고 한다. 정부가 통일대축전과 관련해 북한측에 제의할 행사 중에는 판문점 경축음악회, 남북교회의 판문점 공동기도회, 남북대학생 교환방문 등 직.간접으로 판문점과 관련이 있는 행사들이 많아 판문점을 통한 남북교류가 갑자기 활기를 띨 전망이다. 뿐만 아니라 현대에 이어 대북경협에 나설 다른 기업들도 판문점을 통한 방북을 요청하고 있는가 하면 학술 문화교류를 추진하는 민간단체들도 각종 행사를 판문점에서 치른다는 방침이다. 북한측이 지난 몇해동안 한반도의 군사적 긴장상태를 강조하기 위해 판문점을 사실상 봉쇄한 이후 남북접촉이 있을 때마다 베이징으로,제네바로 떠돌던 때가 바로 엊그제인데 갑자기 "판문점 러시"라니 실감이 나지않을 정도다. 판문점 러시는 두말할 필요없이 남북간의 교류가 지름길을 타고 직거래 형태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통일기반 조성을 위해 반드시 거쳐야만 할 과정이기도 하다. 하지만 남북한 직거래에는 아직 적지않은 위험이 따르고 있음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새정부 대북정책의 핵심기조인 "햇볕론"과 "정경분리원칙"이 정회장의 방북으로 가시화되면서 많은 대기업 총수들이 너도나도 거창한 대북 경제협력프로젝트를 들고 북행열차를 타려하고 있지만 아직 그렇게 서두를 단계는 아니라고 본다. 최근들어 북한이 화해와 협력을 유난히 강조하는 등 미세한 변화의 조짐을 보이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남북교류를 통해 북한사회에 동요의 계기가 발생하게 될 것을 두려워하는 북한당국의 기존 입장에 근본적인 변화가 일고있다는 증거는 아직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정회장의 방북사실은 보도하면서도 세계적 뉴스가 된 소떼에 관한 보도에는인색한 북한의 표리부동한 자세에서도 과거와 근본적으로 달라진 것은 없다는 인상을 받는다. 올가을 금강산 유람이다, 대규모 레저사업이다 하여 당장 남북교류와 합작투자가 활성화될 것 같은 분위기이지만 이렇다할 이유도 없이 하루아침에 일방적으로 백지화될 수도 있는 것이 지금까지 우리가 수없이 겪어온 남북경협의 실상임을 잊어선 안된다. 금강산 공동개발계획만 하더라도 정회장의 1차 방북시 원칙적인 합의를 본 이래 벌써 9년이 흐르지 않았는가. 남북간에 투자보장협정 하나 없는 현실이 말해주듯 남북경협의 길은 여전히 멀고 험난하다. 조급함을 버리고 느리더라도 꾸준한 소걸음의 자세를 유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6월 20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