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여록] 기업논리 안통한다

요즘 기업이 느끼는 은행은 제왕과 같은 존재다. 자금줄을 쥐고 있고 회생여부를 판별하는 생사여탈권도 갖고 있다. 은행이 기업에 요구하지 못할것은 아무것도 없다. "은행을 통한 대기업개혁" 정책이 은행의 위상을 이처럼 한층 높여 줬다. 대기업 총수들이 최근 은행을 자주 찾고 있는 것도 은행의 존재를 새삼 깨달았기 때문이다. 한 재벌총수는 지난주 55개기업의 퇴출판정을 보고 단죄자(은행)가 죄인(기업)을 심판하는 것 같았다고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굳이 퇴출판정이 없어도 상당수 재벌 총수들은 이미 주거래은행에 주식포기각서를 제출했다. 불투명한 그룹운명을 전적으로 주거래은행에 맡긴 셈이다. 오로지 은행의 "선처"를 바라면서 말이다. 최근 재계모임에서 만난 30대그룹의 총수는 이제 자신은 아무것도 가진게 없다고 말했다. "방만한 차입경영" "선단식 경영"이라는 멍에를 지고 있는 그룹 총수들은 이제 "시어머니"(은행)의 간섭을 받아들일수 밖에 없게 됐다. 그러나 한편으로 섭섭한 감정도 없지 않다고 덧붙였다. 기업과 은행관계에서 기업논리는 좀처럼 찾아볼수 없다는 것이다. 은행은 여전히 채권확보에만 급급하다. 퇴출판정기간에 은행은 관련 기업으로부터 1조원이 넘는 대출금을 회수했다. 기업도 살리고 은행의 재무구조를 건실화할 수 있는 묘안을 찾으려는 노력은 별로 보이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효율적인 기업 및 은행의 구조조정이 가능한지 기업인들은 궁금해 하고 있다. 심지어 신용평가능력부족으로 거대한 부실채권을 떠안고 있는 은행이 어떻게 기업생존여부를 결정할 수 있느냐는 볼멘소리도 나오고 있다. 이익원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6월 23일자 ).